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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둥 Jan 3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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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방어적 이상형이라는 표현을 보았다.
원래 있는 단어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런치 대상을 받은 조태호 님의 글을 보다가 직감적으로 이 말이 내게 해당된다는 것을 알았다. 내 마음 상태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단어였다. 내 감정의 실체를 명확하게 들여다보게 되니까, 그게 너무 환해서 며칠 동안 어질어질했다.

4년 전, 어깨 수술을 하게 되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내 몸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인생도 꺾이기 시작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심란했다. 게다가 함께 일하던 사람들조차 내가 의지가 약해서 일을 그만두었다고 비난했다. 사람들에게 정이 떨어졌다.
죽을 만큼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그만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대로 마감하면 딱 좋은 시점이라는 방어적 이상형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삶이 지속된다는 건 다시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고, 그 고통은 너무 잘 아는 고통이라 반복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때 정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폐암 3기. 이미 뼈에도 전이가 되어서 회복이 쉽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정인을 자주 만나고 살지는 않았다. 1년 후배이기도 했고 딱 봐도 어두운 아이가 씩씩한 척하는 게 불편해서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죽고 싶은 그때, 그녀에게 죽음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괜히 죄스러워 자주 안부를 묻게 되었다.
그 탓이었을까. 그녀는 내게 바짝 들러붙었다.
"언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하필 그녀는 죽고 싶은 내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니, 그동안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에 맞게 세팅을 하고 살았다. 농사지으면서 자급자족하고 싶어서 땅을 사고 집을 짓고 텃밭을 일구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녀 자신이 바라던 모습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언니, 내가 회사에서 꽤 괜찮은 기획자였거든. 그래서 내 장례식도 기획해놓을까 해."
죽음을 말하는 그녀에게 죽고 싶은 나는 맞장구쳐주기가 힘들었다. 꼰대처럼 대답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살 궁리를 할만한 말을 던져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뭔가 하고 싶은 일 없어? 지금까지 안 해왔던 일이나 해보고 싶었는데 못했던 거. 왜 사람이 죽어갈 때 하고 싶은 거 하면 마음이 풀리면서 몸도 좋아진다고 하잖아.”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사는 게 고달파서 굳이 살기 위해 애쓰고 싶지 않다고. 살고 싶지도 않은데 조금 더 살겠다고 지금까지 쌓아 올린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아니, 새로운 일을 하는 건데 그게 뭐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야?"
뻔히 아는 거지만 그래도 뭔가 반박해야 했다.
"아냐, 언니. 그동안 하고 싶은 거 참느라 암 걸렸다는 말도 듣기 싫고, 안 하던 짓 하면 살려고 발악하는 것밖에 안 돼. 추하게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거, 나 스스로도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힘들어."
가끔 정인은 페스티벌 같은 곳에 가보고 싶다고 했으나 바로 마음을 접었다. 대신 어린 시절 자신이 자랐던 벌교와 순천을 둘러보고 왔다.

정인이 죽어가는 동안, 나는 살 궁리를 했다. 살아있으니 어쨌든 살 궁리를 해야 했다. 예상대로 너무 잘 아는 고통은 어김없이 내게로 직진해왔다.
그동안 마을에서 활동가 일을 해왔던 내가 집에만 처박혀 있었더니 주변에서 말이 돌기 시작했다. 말은 눈덩이처럼 커져서 내 집을 덮칠 기세였다.
나는 집에 처박힐 명분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했던 일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나를 두고 말이 나는 것은 내 이름에 거품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일을 하다 보면 책임자가 필요하고 거기에 내 이름을 내걸다 보니 내 이름에 거품이 생겼다. 이대로 일을 정리하고 나면 거품도 꺼지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정리된 글이 책으로 나오게 되었고 책은 또 다른 거품, 아니 오히려 증거품이 되어버렸다. 책이 나온 순간, 내가 그렇게 당황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내 생각과는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 것이다. 일을 그만두기 위해 시작한 것인데 오히려 그 일로 더 들어가야 하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가장 중요한, 경제적인 부분이 등을 떠밀었다. 책의 저자로서 강의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건 내 목에 또 다른 이름을 달아주었다.
작가. 내 목에 걸린 이름에 적당해 보였고 덜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나는 방어적 이상형에 걸맞기 위해 나는 서둘러 작가가 되기로 했다. 어느 날 그림책 작가가 된 지인을 만났는데 그게 참 괜찮아 보였다. 머리 쓰는 일이 너무 싫고 가슴으로 살고 싶었다. 그렇게 진짜 작가가 됨으로써 내가 가진 이상형을 다른 방식으로 완성하려고 한 것이다. 아는 고통을 피해 모르는 고통을 선택한 줄도 모르고.
거품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눈을 흐려 놓았다. 가장 친한 언니가 나에게 시기 어린 눈길을 보낸 것이다. 남의 말 신경 안 쓰기로 이력이 나있었지만,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의 한방은 생각보다 힘이 셌다. 그대로 무너졌다.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정인은 가끔 살고 싶어 하기도 했다.
"언니, 48세에 죽는 건 좀 이르지 않아?"
그래도 너무 늦는 것보다 좀 이른 게 낫지, 라는 말을 나는 속으로 삼켰다.
"좀 이르지. 그러니까 뭔가 하고 싶은 일을 하든지, 가고 싶은 곳에 가든지 뭔가 해보자. 다음 생은 좀 더 나은 영혼으로 태어나야지."
"언니. 다음 생 같은 거 없었으면 좋겠어. 난 그렇게 믿을래. 그냥 흙이 되는 거야."
정인은 멀쩡한 정신일 때 친구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어 했다. 정인의 호출에 윤경이 제일 먼저 달려왔다.
정인은 윤경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딴 게 왜 궁금해! 그딴 거 다 때려치워."
윤경은 거칠게 대답하며, 남편과 싸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인과 나는 그녀 남편을 잘 알기에 깜짝 놀랐다. 그녀의 남편은 독서량이 어마어마하고 인문학적 지식과 자세가 남다르며 지혜로운 사람이라 주변 사람들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조언을 구하는 대상이었다. 그는 항상 사람 좋은 웃음을 웃으며 남을 돕는 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몸이 약해 자주 아프다는 이야기는 건네 들은 적이 있었다.
“밖에서만 세상에 없는 인자하고 경우 바르면 뭐하냐고. 나한테 사과하라니까 뭐라는 줄 알아? 미안한 거 없대. 아니, 자기 이름에 걸맞게 살기 위해서 그렇게 책을 사고 읽고 그러면서 미안한 줄을 모르냐고 그랬더니, 자기가 아직 그거밖에 못되어서 공부를 하는 거래."
윤경은 거칠게 말하기 시작했지만 다시 스스로를 다독여서 천천히, 감정을 최소화해서 그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자세로 한마디 한마디 눌러 말했다. 하지만 남편이 자기감정의 배출구로 아내를 택한 것이라는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해 출판사에 몇 번이나 투고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급한 대로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다. 독립출판으로 책을 내는 것이었다. ‘급한 대로’라고 말한 것은, 일을 그만두면서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나로 사는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견디기 힘들었다.
책이 나오고 주변 사람들에게 내 책을 소개했다. 아니 내가 작가가 되었음을 알렸다. 이제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지 않으니 이전의 나는 잊어주세요,라고. 하지만 sns상에서만 나는 작가였다. 서로를 작가님, 이라 부르며 작가 코스프레인 것만 같아 욕망은 더욱 들끓어올랐다.

언니네가 이민을 갈 때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지만 남의눈을 의식해서 사는 언니네의 삶이 안타까웠다. 대기업 간부였던 형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보다 ‘미국 사는’이라는 이름을 걸기로 한 것이다. 미국의 작은 아파트에서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는 처지지만 고향에서 형부는 ‘미국에 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형부는 미국에서 공인중개사로서 성공했다. 돈을 아주 많이 벌었지만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은 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돈은 형부를 자유롭게 하지만 한국에서 그 돈이 형부의 이름을 사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남의 눈이 뭐라고, 남의눈을 피해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지도 못하나, 그러면서 언니를 안타까워하던 내가 언니나 형부와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가진 게 없어서, 이름을 갖고 싶다고 작가가 되려 안달복달할 줄은 몰랐다, 내가.

성철 스님은 발로 툭 차고 길을 나설 수 있는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집이나 차는 물론이고 어릴 때부터 문방구에 있는 예쁜 것들을 탐하지 않고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갖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선을 그었던 것 같다. 내가 하는 일, 사는 곳에서도 언제든 툭 털고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고들 했지만, 그게 뭐가 어렵다는 건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애착, 미련, 욕심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방어기제였던 것이다. 지랄 총량의 법칙처럼 몽땅 모아서 한 번에 이렇게 내 이름을 걸고 발광을 한다.
성철 스님의 말씀은 집이 아니라 이름을 내던져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나는 집만 차고 이름에 목을 매고 있다.

정인은 진짜 장례식까지 모두 기획해놓고, 제 갈길을 가버렸다. 자신이 좋아하던 음악과 사진과 그림을 적절히 배치했고, 소중했던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겨놓았다.
그녀의 장례식은 문상 온 사람들로 말 그대로 줄을 섰다. 어린 상주가 맞절하느라 무릎을 절었다. 정인의 친구들은 어린 상주를 빼돌려 쉬게 해 주려고 이리저리 불러댔고, 줄 선 사람들에게 우르르 같이 들어가서 절하라고 속닥거렸다.
사람들은 그녀가 원했던 딱 그대로의 그녀로 추모했다. 그녀에 대해 기억하고 그녀를 그녀라고 말했다.
나도, 그녀를 위해 울지 않았고, 그저 그녀를 온전히 기억했다. 정말 온전히 그녀를 이해하는 한 사람이 여기 있노라,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 그녀의 삶은 성공이지 않나, 하는 안도감이 생겼다. 삶에 성공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다.

49대 51. 내 앞에 놓인 길이라면 어느 길로 가든 선택의 결과는 어차피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진 그릇이 고만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라는 것도 정해져 있다. 운명론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전제로 하는 말이다. 만일 내가 작가가 되겠다는 소망을 갖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그저 방어적 이상형이라는 벽 앞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했더라면 지금의 나, 그러니까 그때 내가 방어적 이상형 앞에서 힘들었던 거구나,를 깨닫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작가가 아니라 다른 것을 선택했을지라도, 다만 선택의 문제였을 뿐이지 내가 맞이할 결과적 만족도는 같았을 것이다. 그러니 선택의 길 앞에서 너무 망설일 필요 없다는 의미다.
애써 내 감정을 다스리고 내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해봤지만, 그곳 어딘가에 소망을 두고 나아가는 것, 인간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소망을 두고 나아가는 것이라는 말도 앞서 말한 브런치에서 한 표현이다.) 어차피 49대 51이니까 내가 못 간 길을 아쉬워할 필요도 없고 나의 선택을 자책하거나 후회할 필요도 없다. 지금의 나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살아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정인아, 내가 너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여기는 것처럼 나도 여기를 떠날 때 나를 온전히 이해하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만난 사람이어도 좋고 sns에서 스치듯 내 글이나 그림을 본 사람이어도 좋겠지.
아직 살 날이 많아서, 좋은 단어를 만난 기쁨 같은 걸로 속을 덥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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