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티뷴 Dec 01. 2023

이 겨울, 슈베르트

일터 근처의 풍경입니다. 천천히 흐르는 청계천이 보입니다.  오늘따라 청계천의 움직임이 잿빛 구름을 따라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가로수들은 온통 물이 들었다 싶기 무섭게 가지를 드러냈습니다. 붙어 있는 나뭇잎은 몇 안됩니다.


나희덕의 시가 생각납니다.

“나뭇잎들은 떨어져 나가지 않을 만큼만 바람에 몸을 비튼다. 저렇게 매달려서 견디어야 하나?”


12월입니다. 만물이 소멸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침묵 속에서 소멸하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것들을 바라보며 순간 가슴이 싸합니다.


이때가 되면 자주 듣는 음악이 있습니다. 슈베르트입니다.


슈베르트는 31살에 요절했습니다. 모차르트보다도 짧은 생애였지요. 더구나 그 시기에 빈에서 슈베르트가 음악가라는 것을 알아준 사람은 친구 몇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평생 음악회를 한 번밖에 열지 못했지요. 지독히 가난했고,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매독으로 장가도 못 가고 죽었습니다. 불행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음악가로 인정 받지 못하는 현실의 벽에도 불구하고 슈베르트가 멜로디에 있어서는 절대미학을 완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렵습니다. 아름다운 곡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짧은 생애 또한 600여 개 이르는 가곡과 8권의 교향곡 등 다작을 내놓았습니다.


영국의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를 아시나요?


깡마른 체구와 큰 키, 해골과도 같은 수척하고 창백한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영국의 명문 옥스포드대 역사학 박사입니다. 정규 성악교육 없이 서른이 넘어 데뷔했지요. 근 15년 전 그의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고양시의 아람누리 음악당이었습니다. 오래전 일임에도 생생히 기억하는 까닭은 그만큼 그날의 공연이 특별했기 때문이지요.


바로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를 노래했습니다.


큰 키의 보스트리지가 성큼성큼 걸어와 무대에 섭니다. 잠시 호흡을 고르자마자  반주자 드레이크의 경쾌하고 짧은 피아노가 울립니다. 이어 "방랑하는 것은 물방앗간 청년의 즐거움 이라네. 방랑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그의 목소리가 퍼집니다. 생각보다 성량은 작습니다만 딕션과 목소리의 표현력은 제일입니다. 공연장은 이내 조용해졌고 객석의 집중도는 높아졌습니다. 그날 청중의 공기가 유난히 착 가라앉았지요.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는 "리트"입니다. 리트란 낭만파 서정시에 음악을 결합한 독일 연가곡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뮐러의 시에 부친 슈베르트의 첫 가곡집이기도 하지요. 주인공은 시골 물방앗간에서 일자리를 잡은 한 청년입니다. 청년은 주인집 딸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러곤 그녀와의 열병 같은 사랑을 이루죠. 하지만 이내 더 경험 많고, 더 매력적이고, 더 나이가 많은 연적(사냥꾼)에게 애인을 빼앗깁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청년은 질투하고 좌절하다 결국 시냇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보스트리지는 그 모습이 마치 주인공이 현신한 것만 같았습니다. 피아노에 기대어 쓰러질 듯 노래하다가도, 질투에 사로잡힌 청년의 마음을 대신할 때는

무대 앞으로 나와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분노에 차 노래했으니까요. 푹 빠져 듣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20번째 곡, "시냇물의 자장가"입니다.


시냇물은 피아니시모로 죽어가는 청년에게 속삭입니다.


“이제는 편히 쉬어. 눈을 감아도 돼. 지친 방랑자여, 집에 돌아왔네. 이곳 만큼은 변하지 않아. 내 곁에 누워.“


첫 소절을 들으니 울컥해집니다. 그의 비극이 내 가슴에도 칼날처럼 박혔다가 뽑혀나갑니다.

마지막 곡 "시냇물의 자장가"

공연이 끝나고 음악당 로비에서는 사인회가 열립니다. 관객들이 쓰나미처럼 몰려나와 서있습니다.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그날 저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낯선 일산의 거리를 무작정 걸었습니다. 바람이 차가웠지요. 한참을 걸었습니다. 제 젊고 순수한 시절의 사랑과 고뇌 그리고 내가 준 상처, 반대로 내가 겪은 아픔, 마지막으로 죄책감, 여러 복잡한 상념들이 깊은 곳에서 올라왔습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감정이라서 쓰라렸나 봅니다. 그날 이후 며칠을 지독한 감기로 고생했습니다.


오늘처럼 부쩍 추워진 이 계절이 느껴지면 늘 한 번씩 떠오르는 그날입니다.


이 겨울, 슈베르트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슈베르트의 "음악에 부쳐" / 노래 이안 보스트리지


그대 고상한 예술이여,
인생의 거친 쳇바퀴에 나를 끼워 맞추던
그 많은 회색빛 시간들 속에서
그대는 내 마음을 따뜻한 사랑으로 불지피고
보다 나은 세상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종종 탄식이 그대의 하프로부터 흘러나왔고,
그대의 달콤하고도 신성한 화음은
보다 행복한 시간의 하늘을 내게 열어 주었다.
그대 고상한 예술이여, 그것들에 대해 그대에게 감사드린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