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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뷴 Feb 12. 2024

3개의 롤렉스 서브마리너

군대를 다녀와 복학하기 전 미국에 어학연수를 갔다. 캘리포니아 샌디에고에 있는 대학이었다. 샌디에고는 지금이야 야구의 김하성으로 유명한, 모르는 이가 없는 곳이다. 하지만 한참 전의 나로서는 첫 해외 나들이었는데,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어학원에서 추천해서 고른 곳이었다. 샌디에고는 늘 맑고 화창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도 화창함이 묻어났다. 어디를 가도 "How are you today?” 하면서 하얀 치아를 씩 드러냈다. 나는 "좋아요. 그쪽은 오늘 어때요?"하고 되물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하는 대꾸가 돌아왔다. 슬픔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그런 동네였다. 고단함이 왜 없었겠는가? 웃음을 강요받는 미국 사회가 측은하게 느껴진 것은 한참 후였다.


당시에는  노티카라는 의류 브랜드가 유행이었다. 말 그대로 바다를 질주하는 매끈한 요트 위에서 차려입는 그런 캐주얼이었다. 늘 노티카를 입고 오는 한국 남학생이 있었다. 그는 나와 한국 대학 동문이었다. 요트 돛이 새겨진 파스텔톤의 반팔셔츠에 흰 반바지를 매칭하고 턱수염을 멋지게 길렀다. 그의 오른쪽 손목(왼쪽이 아니다)에는 묵직한 시계가 있었다. 나는 그때 아울렛을 처음 가봤다. 하루종일 고르고 골라서 40불 정도 했던 타이멕스 시계를 샀다. 그런데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그의 시계는 번쩍 거리는 게 남달라 보였다. 검정판의 롤렉스 서브마리너였다. snl 코리아에서 흉내 내는 그 시절의 서울 사투리를 그가 구사했던 것도 같다. 나중에 학교에서 그를 우연히 보기도 했다. 어느 날 검정 BMW 컨버터블이 경영대 앞에 서 있었다. 미국에서 타던 그의 차였다. 그때는 소나타만 타고 학교에 와도 주목을 받을 때였으니, 하물며 뚜껑이 열리는 차라니. 가까이 가서 보니 그였다. 늘 그렇듯 그의 얼굴에는 구김이 없었다. 잠시 옆 자리에 앉은 나를 보며 흰 치아를 씩 드러냈다. "와... 덥죠?" 하면서 오른손으로 빨간색 등이 들어온 에어컨 조절 버튼을 최대로 틀었다. 그의 손목에는 역시나 그 롤렉스가 있었다. 성공한 남자들의 상징이라고 회자되는 롤렉스 서브마리너. 학생이었던 그는 이미 성공한 남자였던 건가?

   


내 회사는 서울의 한복판, 시청과 을지로 입구 사이에 있다. 근처에는 서울파이낸스센터라는 건물이 있다. 원래는 호텔로 사용하려고 지은 그래서 꽤 럭셔리한 내외관을 자랑하는 건물이다. IMF 이후 싱가포르투자청에서 인수를 하고, 사무용 건물로 임대하고 있다. 이 건물에는 외국계 금융회사들의 한국지사가 다수 입점해 있다. 지하에는 맛집들이 꽤나 포진해 있다. 그래서인지 트렌디한 수트를 빼입은 키 크고 멋진 외국인들도 여럿 마주치는 곳이기도 하다.


신혼여행을 스위스로 갔었다. 거기서 아내와 나는 커플 시계를 하나씩 샀다. 스위스 브랜드 론진이었다. 롤렉스 살 돈도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때 산 오토매틱 시계가 고장이 났다. 서울파이낸스센터 건너편에는 롤렉스 정식 수리점이 있다. 론진도 고쳐주나 싶어 방문했다. 사장은 수리비로 25만원을 불렀다. 백 몇십만 원 주고 산 시계의 수리비로는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고칠까 말까 고민하던 그때, 건너편 서울 파이낸스 센터에서 회색 양복을 빼입은 외국인이 수리점 문을 열고 성큼 들어온다. 기럭지가 정우성 뺨을 후려칠 기세다. 손목에서 시계를 풀더니 봐달라는 손짓을 한다. 검정판 롤렉스 서브마리너였다.


수리점 사장은 시계를 잠시 본다.

그러곤 외국인을 보며 손을 가로저으며 한마디 한다.


"훼이크, 훼이크, 노, 노"


? 아... fake!

가짜구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데, 외국인은 순간 멋쩍었나 보다. 아무 대꾸 없이 휙 시계를 낚아채어 나가버렸다.


얼마 전 스피또 1등에 당첨된 이가 화제였다. 그는 즉석복권 당첨 사실을 인스타에 인증하고, 세후 당첨금 14억이 찍힌 통장을 또한 인증했다. 그리고는 짧은 시간 안에 2억 2천만 원의 명품을 소비했고 그 과정 또한 인증했다. 그의 구입 목록에 검정판의 롤렉스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가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14억은 아니 줄어든 11억 8천만 원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아이의 정시 대입 시험 결과가 나왔다. 3군데 다 떨어져 버렸다. 아이나 나나, 아내나 며칠 말이 없다가, 오늘 셋이서 모여 대화를 나눴다.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 고민이 많은 며칠이었다. 아이는 평범한 mz다. 최신 아이폰이 갖고 싶고, 명품도 한번쯤 써보고 싶다. 그러나 복권에 당첨될 일도 없겠지만, 그리고 내가 아무리 여유가 많다 한들, 롤렉스를 물려주거나 사줄 것 같지는 않다. 몇십 년 전 샌디에고의 그 친구가 지금도 그 롤렉스 서브마리너를 차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롤렉스를 수리하러 왔던 멀쩡한 외모의 그 외국인은 자신의 시계가 짝퉁임을 모를 리 없다. 스피또에 당첨된 운 억세게 좋은 친구의 롤렉스는 과연 그에게 얼마나 머물러 있을까?


딸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딸! 아빠는 네가 기를 쓰고 재수해서 먼 훗날 롤렉스를 구입할 수 있는 고소득 직업을 가질 수 있는 대학에 가는 것을 바라지 않아. 짝퉁임을 알면서도 정식 수리점을 방문하는 뻔뻔함이 세상살이에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복권에 당첨될 수 있는 운을 기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 너에게 주어진 이 젊음이라는 시간이 선물이고, 입시에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네가 가진 행운이라는 점을 얘기해주고 싶어. 그리고 롤렉스를 찬 남자 친구가 아니라, 인생을 대하는 생각과 자세가 올바른 그런 남자 친구를 가려낼 수 있는 눈을 갖추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이번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고 너희 하루에 작은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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