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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티뷴 May 07. 2024

힙지로 유감

가족여행으로 로마에 갔을 때다.


도심의 오래된 골목길을 여기저기 탐험하며 구경하고 있었다. 어느 골목을 돌아 나오니 갑자기 눈이 번쩍 뜨이는 풍경이 나왔다. 트레비 분수였다. 해 질 녘의 분수 앞은 그 자체로 그림 같았다. 인산인해의 관광객들은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가까스로 찍은 가족사진을 내 졸업장 액자에 끼워놓았다. 큰 아이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가 그 사진을 보고는 이러더란다.


"롯데월드에서 찍은 이 사진, 참 잘 나왔다!“


잠실역 지하에 로마의 트레비 분수를 축소해서 카피한 분수가 있다. 실제로 로마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트레비 분수 보러 잠실역 가자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점이다. 오리지널리티와 컨텐츠는 그래서 중요하다.

로마의 트레비 분수와 관광객들

살풍경(殺風景)이라는 말이 있다.


보잘것 없이 메마르고 스산한 풍경을 말한다. 서울 도심의 을지로는 이곳저곳 재개발 중이다. 그러나 공구점들이 여전히 많다. 낡은 골목 여기저기에서는 기계 돌아가는 굉음 소리가 요란하다. 비 오는 날 인적 드문 을지로의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보면 그야말로 살풍경이다. 내 회사는 을지로에 있다. 을지로입구역을 통해 출퇴근 한지도 20년이 넘어간다. 나로서는 여기저기 가본 곳이 제법 된다.


살풍경스러운 을지로 골목 안에는 “갯마을 횟집"이 있었다. 퇴근한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잔 걸치는 곳이었다. 처음 데리고 간 회사동료는 "이런 골목에 횟집이 있다고?" 반신반의하며 따라오는 눈치였다. 막상 자리에 앉은 그는 노포 특유의 분위기와 감성돔회의 맛에 취해 황홀해했다. 우리는 소주잔을 부딪히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소문나서 북적이면 내가 못 오니까, 우리끼리만 알자 뭐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은 것 같다. 이제 그 자리의 갯마을 횟집은 헐려서 다시는 볼 수 없다. 다른 곳에서 같은 메뉴로 영업 중이긴 하지만, 그때의 그 느낌이 똑같이 재생되지는 않는다.

갯마을 횟집의 감성돔 회

을지로가 몇 해 전부터 "힙지로"가 되어가고 있다. 공구골목 안에서 몇몇이 음식점이나 카페로 재탄생하고, 이것이 SNS 마케팅으로 퍼져 나가면서 새로운 가게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언제부턴가 트렌디한 옷을 차려입은 젊은 친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새로 문을 연 가게는 동남아 어딘가에 온듯한 정교한 내외관과 메뉴로 무장하고 손님을 맞기 시작했다. 식당의 풍경은 SNS에 올라가면서 유명해지고, 그 옆 공구점은 어느새 또다른 새로운 식당이 되고는 한다.


문제는 "핫"하고 "힙"했던 공간들이 1년도 못 가서 문을 닫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점이다.


힙한 가게는 원래는 개성으로 가득한, 그래서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그런 공간이 되어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의 힙지로는 그저 최신 트렌드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니 장수하기가 어렵다. 트렌드에만 집중하는 전략은 애초에 지속가능하지가 않다. 트렌드는 그저 시간이 지나면 아무도 보지 않는 뉴스와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지금의 힙지로는 그점에서 유감이다. 갯마을처럼 살풍경 속의 오래된 노포가 주는 묘한 편안함과 정취가 을지로만의 오리지널리티였기 때문이다. 힙지로에 사진으로만 그럴싸한 식당 보다는 제2의 갯마을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이유다.


갯마을 횟집 옆에 있던 그 유명한 "을지면옥"이 낙원 상가 근처에서 새 단장을 끝내고 오픈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을지면옥의 평양냉면을 원탑으로 여기는 나로서는 설레는 마음으로 가보려 한다. 한 그릇의 평양냉면에서 변치 않음이, 그리고 그들의 접객태도에서 온기가 스물스물 올라왔으면 한다. 그래서 또 다른 한 세대를 롱런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고 식당문을 나올 수 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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