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AI가 다 해줄까? 대학생 딸에게 필요한 능력

by 스티뷴

대학 시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공부할 때였다. 자동차 여행을 떠나려면 Atlas라는 커다란 종이 지도책이 필수였다. 내비게이션이란 개념조차 없던 시절, 나는 형광펜으로 길을 표시하고 볼펜으로 메모를 남기며 머릿속에 경로를 그려 넣었다. 물론 길을 잃는 일도 다반사였다.


한 번은 샌디에고의 북쪽으로 한참을 운전하다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당황해 차를 돌려 나왔는데, 그곳은 바로 영화 '탑건'에서 톰 크루즈가 F-14 전투기를 몰고, 오토바이를 질주하던 "미라마르" 해군기지였다.


그때를 떠올려 보면, 지도 한 장을 들고 세상을 바라보던 시절은 긴장과 집중의 연속이었다. 길을 읽고, 지형을 살피고, 주변 환경을 세심히 관찰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때의 풍경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반면, 티맵이나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길은 AI가 찾아준 최적의 경로일지언정, 내 스스로 선택한 길은 아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길을 잊고, 여행의 흔적이 희미해진다.


딸이 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첫 수업이 무엇인지 물어보니, "Critical Reading and Writing"이란다. 원어민 교수가 진행하는 강의였다.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AI가 보편화되면서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를 활용하는 비율이 급격히 증가했다. 파이낸셜 타임스(FT)에 따르면, 영국 대학생의 92%가 AI를 사용하고 있으며, 시험이나 과제에 활용하는 비율은 불과 1년 만에 53%에서 88%로 치솟았다.


나 역시 챗GPT와 퍼플렉시티(Perplexity)를 유료로 사용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는 챗GPT를, 정확한 출처가 필요한 경우에는 퍼플렉시티를 활용한다. 업무상 해외 로펌 변호사들에게 영문 이메일을 쓸 일이 많은데, 과거에는 Quillbot 같은 패러프레이징 사이트로 문장을 다듬곤 했다. 요즘은 국문으로 내용을 작성한 뒤, 단 한마디만 한다. "번역해 줘." 그러면 AI가 자연스럽고 원어민다운 영어로 변환해 준다. 최종 편집은 내 몫이지만, 그 과정이 한결 수월해졌다. 덕분에 캐나다 출장 중 만난 현지 변호사는 수차례 오간 내 영어 이메일 탓에 나를 교포로 착각하기도 했다. 막상 이야기해보니 아님을 알아차리고 꺼낸 얘기이기도 하다.


AI의 완성도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 이제 인간은 정보를 직접 생산하기보다, AI가 제공하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수정하는 역할이 중요해졌다. 정보 수집에서 정보 검증으로, 문제 해결에서 AI의 응답을 통합하는 과정으로, 직접 수행에서 관리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역할이 변화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딸이 처음 배우는 과목이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라는 점이 반갑다.


AI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정보를 제공할 수 있지만, 해결책을 대신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부정확한 정보를 제시하기도 한다. 한번은 광화문 근처에서 특정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AI는 자신만만하게 정보를 내놓았다. 하지만 정작 확인해 보니 폐업한 곳이거나, 심지어 전라남도에 위치한 식당이었다. AI의 정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잘못된 학습과 다를 바 없다. 심지어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AI를 활용하되, 스마트하게 활용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AI 없는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단전과 단수가 예고 없이 발생하듯, AI 역시 언제든 중단될 수 있으니까.


언어 능력에는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의 네 가지 요소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고난도의 능력은 쓰기다. 미국 로스쿨 시절, 기말시험은 3시간짜리 에세이 시험으로 진행됐다. 오픈 북이었지만, 교과서를 뒤적이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3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시험 방식은 명확했다. 단순 암기가 아니라, 비판적 사고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미국 로스쿨은 장래의 변호사가 얼마나 많은 법 조항을 암기했는지를 평가하지 않는다. 대신, 주어진 문제를 얼마나 깊이 분석하고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를 본다. 차별화된 답안을 쓰려면, 평소에도 두꺼운 책을 진득하게 읽으며 맥락을 이해하고 핵심을 짚을 줄 알아야 한다. 기본기 테스트인 셈이다. 물론 변호사 시험을 준비할 때는 엄청난 양을 암기해야 하지만, 사고력 훈련이 선행되지 않으면 암기도 무의미하다.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가 있다. 인간이 AI보다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은행 창구의 단순 반복 업무는 AI가 대체하고 있다. 앞으로는 더 많은 직업이 AI와 경쟁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비판적 사고다. 그리고 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독서와 끊임없는 사고 훈련이 필수적이다. 마치 샌디에고의 낯선 어느 곳에서 종이 지도를 보며 길을 찾던 시절처럼,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하는 과정이 기억과 경험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다행히도, 그런 훈련을 이제 막 시작한 딸을 응원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