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은총이었다, 박보경 오틸리아
영화 미션과 선교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나는 고민하지 않는다. 내 대답은 늘 “미션(Mission)”이다.
영화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OST로 특히나 유명하다. 사제로 분한 제레미 아이언스가 낯선 원주민 마을을 찾아간다. 활 시위를 한껏 당긴 채 경계심으로 가득찬 과라니족 앞에서 사제는 오보에를 꺼내든다. 유명한 “가브리엘의 오보에” 테마다. 천상의 음악에 원주민들은 경계심을 내려놓고 그를 맞이한다. 그리고 한사람 더. “로드리고 멘도사”가 있다. 노예 무역상으로 분한 로버트 드니로다. 악의 화신이었던 그는 회개의 길을 택한다. 자신이 입던 무거운 갑옷을 질질 끌며 폭포를 오른다. 속죄의 길이 끝나는 곳에서 그의 갑옷 보따리는 원주민의 칼로 마침내 끊어지고, 울면서 구원을 맞는다. 두고두고 영화의 백미로 남은 장면이다. 영화의 마지막, 원주민들과 생사를 함께하기로 결심한 가브리엘 신부는 십자가를 들고 식민침탈의 총부리에 맞서 걸어간다. 가브리엘 신부는 쓰러지고, 목숨을 잃고 만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은 찰나, 신부와 함께 땅에 쓰러진 십자가를 옆에 있던 원주민이 집어 든다. 십자가를 번쩍 들어올린 채 그가 대신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미션, 즉 선교를 생각할 때 늘 먹먹한 그 장면을 떠올렸다.
한국외방선교회와 박보경의 신간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
한국외방선교회는 한국 교회가 스스로 세운 첫 번째 외방 선교 단체다.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성장했다는 표징처럼, 한국외방선교회는 사제를 전세계 오지에 파견해왔다.박보경 오틸리아의 신간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를 읽으면서, 나는 전혀 다른 얼굴의 선교를 만났다. 한국외방선교회 후원회의 선교사인 그녀다. 책은 파푸아뉴기니에서 알래스카까지, 20여 년 동안 몇 년에 한 번씩 선교지를 방문하며 적어 내려간 여행기이자 묵상글이다. 화려한 사건이나 극적인 고난 대신, 책에는 작고 소박한 순간들이 담겨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음식과 식탁의 이야기였다.
소박한 밥상에 깃든 은총
오틸리아 선교사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오지의 선교 현장 한가운데서 언제나 밥상이 등장한다. 한국에서 파견된 여성 선교사들이 부실한 현지 재료로도 정성껏 음식을 준비한다.
아프리카 모잠비크다. 떡볶이가 먹고 싶다는 젊은 신부님들을 위해서 못할게 없다. 밀가루로 수제비를 뜬다. 떡볶이 양념을 만들어 맛을 내니 수제비 떡볶이가 된다. (p.71) 주민들이 잡은 멧돼지에 불고기 양념을 하기도 하고, 한국에서 가져온 도토리 가루로 묵을 쑤기도 한다. 필리핀에서는 족발을 진공 포장해 가져가서 신부님과 소주에 곁들어 먹는다. (p.161)
현지의 사제들이 밥상을 펼치기도 한다. 파푸아뉴기니다. 사제가 먼길을 찾아와준 선교사들을 대접하는 장면은 뭉클하다. 사제는 닭백숙을 준비한다. 흔한 음식이 아니다. 그곳에서의 닭은 우리가 시장가서 손쉽게 언제든지 살 수 있는 그런 닭이 아니다. (p.176)
사제들과 선교사들은 늘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음식을 나누며 감사드린다. 고국의 맛에 목말랐을 이국의 사제들에게는 특급 호텔 부페보다도 소중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선교의 진면모는 사실 이런 순간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음식을 준비하는 손길 하나, 부족한 것을 아쉬워하지 않고 기뻐하는 마음 하나. 거기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도 늘 식탁에 우리와 함께 앉으셨다.
•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찬미하시고 나누신 오병이어(루카 9,16).
•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낯선 이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가, 빵을 떼어 나눠 주시는 순간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0-31).
• 그리고 최후의 만찬,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라고 말씀하시며, 음식을 사랑의 절정으로 승화시키셨다.
음식은 성경 안에서 단순한 끼니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를 세우는 자리, 하느님을 알아보는 순간, 그리고 사랑이 완성되는 통로였다
영화 "미션"은 선교를 장엄한 드라마처럼 보여준다. 원주민들과 끝까지 운명을 함께한 가브리엘 신부의 죽음은 숭고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속 식탁의 장면은 전혀 다르다. 거대한 희생 대신, 소박한 나눔. 극적 장면 대신, 일상의 감사. 하지만 두 이야기는 결국 같은 길로 모인다. 선교란 목숨을 던지는 장엄한 순간에도, 현지에서 마련한 소박한 밥상에도 똑같이 흐른다. 선교는 곧, 누군가와 함께 머무르고, 함께 먹고, 함께 살아내는 것임을 알려준다.
오랜만에 가브리엘의 오보에 선율을 듣는다. 폭포처럼 장엄한 강물과, 소박하게 흐르는 작은 샘물이 만나 하나의 은총으로 흘러가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