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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의 기적-정동에서 만난 위로의 선율

by 스티뷴

10월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할 때가 왔다. 낙엽이 지는 구부러진 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오래된 교회가 하나 서있다. 정동제일교회다. 이곳에서는 매주 월요일 정오,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 ‘월요정오음악회’. 올해는 교회 창립 140주년을 맞는 해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교회의 붉은 벽돌처럼, 이곳의 음악은 시간의 향기를 품고 있다.


정동교회에서의 상반기 마지막 연주는 지난 6월 9일이었고, 오늘은 하반기의 첫 연주회가 열리는 날이다. 그날도, 오늘도 나는 함께 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나 같은 직장인에게 도심 한가운데서 만나는 고마운 쉼표가 둘 있다. 월요일에는 정동제일교회의 월요정오음악회가 있고, 수요일에는 시청 앞 대한성공회 성당에서 정오음악회가 열린다. 매주 두 번이나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되는 셈이다. 다만 성공회의 음악회는 6월 5일로 일찌감치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건, 정동의 월요일이다.


봄이 되면 정동교회에서 만든 브로셔에 연간 연주일정이 공개된다.


나는 ‘꼭 가야 할 연주’를 표시해 둔다. 오늘이 그날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이올리니스트 “임가진”이다. 그리고 피아니스트 신명진의 반주. 임가진은 서울시향의 제2바이올린 수석이다. 얍 반 츠베덴 지휘자 아래 제1 바이올린에는 “웨인 린” 콘서트마스터가 있다. 그가 오케스트라의 빛이라면 임가진은 그 빛을 부드럽게 받아주는 그림자다. 겸손 속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포스트, 임가진에게는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롯데콘서트홀이나 예술의 전당을 가면 8시 직전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그러면 큰 키의 그녀는 바이올린을 들고 환한 미소로 입장한다. 긴장한 다른 단원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가기 바쁜 와중에, 임가진 만이 하얀 이가 다 드러나는 밝은 웃음 속에, 객석을 둘러보며 천천히 자리에 앉는다. 그녀의 자신감이자 온화함에 객석의 공기가 단번에 환해진다.


오늘의 프로그램은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으로 시작해서, 이자이와 크라이슬러의 곡들을 거쳐,
마지막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5번 —우리가 흔히 ‘봄(Spring)’이라 부르는 곡이었다.


평일 낮이라 교회 안에는 연배가 있는 여성들이 많았다. 12시에 시작이니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어딘가에서 점심 끼니를 채우고 있을 때다. 오늘 나는 바흐의 소나타 2악장의 푸가에서, 그리고 베토벤 소나타의 1악장과 2악장에서 연거푸 휴지를 꺼냈다. 와이셔츠를 입은 아저씨 직장인이 아주머니들 틈에서 눈물 훔치는 민망한 모습이 부디 눈에 띄지 않고 넘어갔기를 바래본다.


임가진은 바흐의 곡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바흐의 소나타는 바이올린 주자들에게는 성경과도 같은 곡이에요.악보 그대로 재현하고 싶은데, 부족한 제 실력이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2악장의 푸가에서는 주님의 단단한 선언이 느껴집니다.”


푸가는 두 줄을 동시에 연주해 서로 다른 성부를 표현하는, 기교적으로도 고난도다. 그에 더해 논리와 구조의 음악이기도 하다. 김봄소리의 콩쿠르 연주 영상을 보면, 마치고 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장면이 나올 정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랬다. 임가진이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푸가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신의 단호한 음성이었다.


베토벤의 소나타를 소개하며 그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이 곡에 ‘봄’이라는 부제가 붙었지만,
사실 베토벤이 직접 붙인 이름은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보기에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 있다는 것, 그게 이 곡이 전하는 메시지 같아요.”

왼쪽이 오늘의 임가진이다.

그 순간,

시편의 한 구절이 마음에 울렸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그래, 오늘 나를 이곳으로 이끄셨구나…


고통 속에서 버티고 있는 내게 긴 추석 연휴도 온전한 휴식이 아니었다.

그런 지친 나에게,
오늘의 음악은 하늘이 보내신 위로였다.


바흐의 그 엄정한 소리 속에서 “삶의 단단함”을 본다.

베토벤의 밝고 투명한 음의 물결 속에서 “삶이라는 거, 살아 볼만하지 않아?” 하는 위로를 느낀다.


나는 숨을 고르고, 다시 용기를 낸다.

임가진의 말처럼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그 안에서도 희망은 여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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