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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다

by 창가의 토토


나는…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더블, 아니 트리플 I형이다.

학창 시절의 나는..

친구가 많지 않고, 마음에 맞는 두 세명 하고만 마음을 나눴다.

공부를 잘하지도 , 그렇다고 열심히 하지도 않았고 적당히 비비적거리다 운 좋게 대학을 들어갔다.

난 대체로 게으르고 수동적이다.

난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또한 나는 미팅이나 소개팅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순진한 아이였다.






지금껏 나는 나를 그렇게 정의 내렸다.


그런데, 한국에 갔을 때 엄마 집을 정리하다가 보물 상자를 발견했다.




연세가 많으신 엄마는 뭐든 “귀찮아”가 입에 붙었고, 실제로 딱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활동만 하시고 계셨다.

물론 밥 먹는 일처럼 일상이 되어버린 새벽기도에 가시는 일이나 교회 행사에 참여하시는 일은 빼고

그런 엄마에게 대청소라는 것은 감히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다.

사실 작년에도 냉장고 냉동고에 있는 것을 싹 다 끄집어내서 버릴 건 다 버리고 정리할 건 다 정리했다.

이번에 한국 가기 전에 엄마는 말씀하셨다.

이제 냉장 냉동고에 아무것도 없다고.

그런데 세상에나.

역시나 꽉꽉 차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작은 검은 봉지에 싸여서.

열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봉지들이 냉동실에서 끝도 없이 나왔다.

어떤 것은 열어봐도 아리까리 한 게 있었다.

이 번 봄에 캔 쑥을 냉동했다가 남편 쑥국을 끓여주려고 가져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 쑥이 아니라 모시잎이다. 어쩔..

엄마는 그걸로 모시송편을 만들어 드시느라 냉동실에 고이 간직하셨는데 그 모양새나 색이 냉동 상태에서는 쑥과 너무 비슷했다.


어디 냉장 냉동실뿐이랴

베란다에는 무슨 무슨 콩, 가시오가피, 나물 말린 것, 국간장, 된장, 팥, 매실청, 찹쌀…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정리를 하려고 해도 도무지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르겠고, 막상 정리를 해 놓는다고 만지면 엄마가 위치가 헷갈리셔서 뭐가 어디 있는지 찾느라 고생하실 것 같아 그곳은 판도라의 상자인양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그럼 또 엄마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어디가 있을까?

요즘은 한국도 붙박이장이 일반화되었지만, 우리 엄마집은 그런 모던한 집이 아니므로 예전부터 쓰던 장롱이 안방에도 작은 방에도 떡하니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작은 방 장롱에는 이불이 얼마나 많은지..

예전에 침대 없을 때나 바닥에 자느라 두꺼운 요부터 이것저것 이불이 많이 필요했지 이제 방마다 침대가 있는데도 엄마 집엔 이불이 넘쳐난다.

엄마는 하나도 버리면 안된다셨다.

나중에 우리들 한국 오면 다 쓸 거니까 아무것도 버리지 말라셨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불이 너무 많다고요.

그런데 엄마를 이길 수는 없다.

내 집도 아니고, 연세가 많으신 엄마에게 뭔가를 버린다는 것은 진짜로 큰맘 먹어야 하는 일인가 보다.


엄마가 기분 좋게 허용한 곳은 장롱이 아니고 장롱 ‘위‘였다.

의자를 밟고 장롱 위를 보니 먼지가 그득히 내려앉은 상자들이 여러 개 있었다.

어디에서 받았는지, 누가 줬는지 언제 받았는지 기억도 못하는 것들이 엄청 많았다.

상자를 열어서 당장 쓸 것은 빼놓고 엄마가 필요없다시는건 내가 챙겨 오기도 했다.

그런데 장롱 위 제일 구석에 상자 두 개가 있었다.

열어보니 그곳에는 학창 시절의 내가 있었다.

그 상자는 친구들이 나에게 준 편지가 가득했다.

무슨 이유였는지 중학교 이후에 여러 번의 이사 중에도 그 편지 상자가 잘 간직되어 있었다.

그 흔한 연애편지는 한 장도 안 들어 있었지만, 그런 건 필요 없었다.

친구들의 편지 속에서 나를 만났다.


친구들은 말했다.

난 유머 감각이 풍부하고, 쉬는 시간에 이 친구 저 친구 자리를 돌며 시끄럽게 떠들고, 너무 여러 명의 친구들과 어울린다며 어떤 친구는 질투를 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 시절의 여자 아이들은 여자끼리도 질투하고 그랬다..)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친구들 눈에 비친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아이였나 보다.

“너 또 공부하지?” “넌 진짜 열심히 공부하니까 꼭 좋은 결과 있을 거야.” 이런 말들이 쓰여있었다.

난 지금까지 우리 애들한테

엄마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서 좋은 대학 못 간 거야. 엄마 공부 진짜 안 했거든.”

이런 말을 했었는데..

… 그럼 나 공부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겨우 그런 대학을 들어간 거라면.. 이건 왠지 진 느낌이다 ㅋ


하지만 최소한 학창 시절 나는 존재감이 없지도 않았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는 걸 알았다.

거기다가 미팅 소개팅도 종종 했었나 보다.

우리 애들 보고

엄마 나이 때 그런 거는 ‘날랄이’들만 하는 거였어” 했는데 난 ‘날랄이’가 아니었는데 그런 것들을 종종 했었는가 보다.

남자 사람의 이름이 바뀌면서 친구들이 안부를 묻는 대목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들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으니 얼마나 시시했는지.. 그리고 아마 그중엔 나 혼자만의 짝사랑도 포함되어 있겠지.

또 어떤 편지에는 “오늘은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왜 울었어?” 하는 말도 있다.

그 당시에 엄마 아빠가 많이 싸우시던 시절이었다.


편지를 하나하나 읽으며 울다 웃다 감정이 요동을 쳤다.

내가 아는 나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우울하고 조용한 아이였는데 그게 아니었나? 싶으며 의아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그럼 지금의 나의 이런 성향은 언제부터 시작된 거지??

역시나 난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직 많다.

시간을 들여 나를 더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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