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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가의 토토 Sep 30. 2024

행복해지도록 노력해 볼게

아빠도 거기서 행복해야 돼!!!

아빠가 돌아가신 지 두 달이 되어간다.


처음엔 충분히 부풀어 오른 봉선화 씨방을 건드리면 ‘툭’ 터지는 것처럼, 모든 일에 눈물이 나왔다.

모든 사물을 아빠의 시선에서 바라보게 됐고, 아빠라면 어땠을까? 아빠가 함께 하신다면 뭐라 하실까? 사방에 아빠의 시선을 , 아빠의 소리를 입혔다.

정작 아빠가 살아계실 때는 아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면서.. 아빠한테 따뜻한 말 한마디 안 했으면서.. 엄마랑 통화를 하면서도 아빠 바꿔달란 말도 안 했으면서.. 이제 와서 웬 효녀 코스프레인지…


때때론 아빠가 돌아가신 것을 부정했다. 엄마 말씀처럼 아빠가 어디 여행이라도 가신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 같았다. 울고, 부정하 고를 되풀이하다가..

한국이 아닌 내 나라(지금 이민 나와 살고 있는 이곳)로 와서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또 그 외의 공간에서 이런저런 내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무기력증과 우울감이 함께 몰려왔다.

다행히 남편과 아이들이 나를 많이 이해해 줬다.

특히 먹는 일이 문제였다. 나 먹겠다고 요리를 하기도 싫고, 때로는 의무감으로 했던 식사 준비가 너무 귀찮았다. 맛있게 해서 가족을 먹이고 싶은 의욕도 없었다.

결국 결혼 20년 동안 절대로 요리 쪽에는 손을 담그지 않으려던 남편과 (아마 한 번 하면 계속 시킬 것 같아서?… 항상 ‘나는 못한다’ 소리만 되풀이하던…) 내가 아까워서 또는 불안해서 한 번도 요리를 시키지 않았던 아이들이 식사 준비를 하거나 어떤 때는 간단히 끼니를 때우면서 최대한 나를 그냥 내버려 뒀다.


알고 있다.

이제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다시 예전의 내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초반에는 함부로 웃을 수가 없었다. 물론 웃을 일도 없었지만, 혹시라도 피식 웃음이 나올라 쳐도 아빠한테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 입관식 때 상조회사 실장님이 하신 말씀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아빠가 원하시는 건 우리가 슬픔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다시 힘을 내서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야겠다.

우리의 뇌는 가짜 웃음에도 속는다고 했으니, 이제 나는 뇌를 속여서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크게 웃어야겠다!

그리고 화장대 앞에 계신 아빠의 사진을 보면서 아빠도 천국에서 행복하시라고 웃으면서 말해야겠다.



아빠가 돌아가시 전 마지막 여행중 아침 산책하시면서 가족 카톡에 올리신 사진. 이젠 이런 모든 것들 하니 하나 소중하지 않은게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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