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가까워오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랜 시골살이를 마치고 우리 가족만 훌쩍 서울로 올라왔기에 어찌 보면 외로울 수도 있는 명절이었는데, 누구에게든 퍼주길 좋아하는 엄마 덕에 평소에도 우리 집엔 객이 많았는데 명절 때는 손님들의 왕래가 더욱 풍성해지기에 엄마는 없는 형편에도 음식들을 푸짐해 준비하셨다.
기름냄새가 집안에 꽉 차도록 전을 부치고, 생선을 굽고, 설에는 꼭 식혜도 만드셨다.
식혜도 두고두고 먹는 겨울철 간식이었다.
냉장고도 필요 없이 그저 바깥에 뒀다가 살짝 배고픈 저녁에 한잔 마시면 그 달달함에 기분이 한층 업돼어 행복함이 발끝까지 전해졌다.
나이가 들고 명절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은 점점 사라지고 결혼 후에는 명절에 대한 끔찍한(?) 경험까지 겪고 나니 이제는 아예 명절이 가까워지면 미리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러다가 이민을 나오고 나니 명절이란 그저 아무 의미 없는 날들이었다.
심지어는 한국과의 시차로 인해서 명절 당일인지 전날인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이민을 나와서도 명절을 지키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가족은 그런 날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다만, 명절을 앞두고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면 수화기 너머로 가족들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그럴 때면 한국 가족이 너무 그리워졌고, 심지어 소외감마저 느껴졌다.
예전에 어떤 분이 이민을 나왔다가 명절에 부모님과 통화하다가 갑자기 한국이 미치게 그리워져서 이민생활을 접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하셨다.
물론 그 외에 다른 이유도 더 있었겠지만, 아무튼 이민자들에게 명절날은 더욱 외로움을 안겨준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의 명절은 더욱 끔찍하다.
자식들 힘든 일 줄이시려고 엄마의 선동하게 엄마 아빠는 명절 거의 한 달 전부터 장을 보러 다니시고 밑작업을 하셔서 냉동 냉장 보관을 하시며 준비하셨다.
도라지를 사다 껍질을 벗기시고, 생선을 사다 소금에 절여 놓으시고, 나물을 미리 불려 삶아 놓으시고, 전 부칠 재료들도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사다 놓으셨다.
그런 모든 준비가 결국은 아빠가 엄마 곁에서 함께 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명절이 가까워올수록 아빠의 부재가 더욱 느껴져서 다들 마음이 무거워졌다.
우리 남매만 있는 카톡방이 있는데 자기 전에 누군가 말했다.
“명절이 다가오니 아빠가 너무 그립다.
우리가 이 정도인데 엄마는 마음이 어떠실까. “
그 카톡을 보고 마음이 한층 무거워져서 잠이 들었다.
꿈에.. 남편이..
“나 내일 한국 간다.”
통보하다시피 말하고 한국으로 가버렸다.
나는 워낙 남편에게 많이 의지하는 편이기도 하고 , 운전하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
꿈에서 내비가 안 되는 곳에서 운전하느라 엄청 마음고생을 하고 있었다.
남편은 평소에 나에게 마음을 잘 표현하는 편이다.
사랑한다는 말도 나보다 더 잘 표현하는데, 그런 남편이 그렇게 훌쩍 떠나버려서 꿈에서 남편에 대한 배신감이 엄청 컸다.
‘그렇게 사랑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나를 이렇게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어떤 당부의 말도 없이 떠나다니..’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다행히 꿈에서 깼다.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이 그렇게 고맙고 듬직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서러움과 안도감에 눈물이 차올랐다.
울다 보니 갑자기 엄마가 생각이 났다.
엄마가 너무 짠해서 마음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갑작스레 떠난 아빠 때문에 내가 느낀 상실감은
감히 엄마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원체 똑똑하셨던 아빠는 뭐든 알아서 척척이셨고, 덕분에 엄마는 대부분의 일들을 아빠에게 의지하셨다.
그런 엄마가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 홀로서기를 하셨어야 했을 때 그 힘듦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으랴.
아빠는 사고로 바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가 며칠 만에 기도 삽입을 하셔서 가족들 누구에게도 어떤 당부의 말씀도 하지 못하고 가셨다.
엄마가 느낀 감정은 단순한 그리움뿐이 아니라 아빠 없이 삶을 살아내셔야 한다는 부담감과 두려움까지 얹혀졌을 거란 걸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제 내 꿈에서 남편이 갑자기 나를 두고 한국으로 가버린 것처럼 아빠는 갑자기 엄마를 두고 다시는 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리셨다.
엄마의 구멍 뚫린 심정을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드려야 할지 생각이 많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