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명절 준비 할 게 없어

by 창가의 토토


남편은 아들 둘인 집안의 장남이다.

시아버님은 가족이 많지 않으시다.

할머니께서 아버님만 업고 북에서 내려오셨다했다.

시어머님은 형제자매가 많으신데, 남편의 외할아버지가 재산이 많으셨는데 그 자신을 오로지 아들들에게만 주시는 바람에 형제자매가 서먹해지고 시어머님은 친정부모님과 거의 연을 끊고 지내셨다고 한다.

사실 어찌 보면 ‘돈’이라는 단순한 개념인 것 같지만, 그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차별을 당하는 느낌을 받았을 것 같아서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딸은 출가외인이라는 생각을 갖고 계신 세대시라 그 시대 분들은 그런 판단이 가능하셨을지 모르지만, 자식입장에서는 충분히 서운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어머님은 크는 과정에서도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시진 않았다.

결혼이 일종의 ‘도피’였다고 말씀하신 걸 보면..

그런 것을 고려해 본다면 시부모님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시고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시는 성향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할머니께서는 아버님의 결혼을 보시지도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다.

그래서 시어머니는 시집살이라는 것을 해보지도 않으셨는데, 왜 나를 그렇게 ‘시집살이’시키려 하셨는지 그것도 참 의문이다.






남편은 그런 말들을 자주 했었다.

자기 가족은 왕래하는 친척이 거의 없어서 명절이면 부모님과 아들 둘 그렇게 네 식구가 단출하게 보냈다고.

항상 시끌시끌 북적북적했던 우리 친정과는 참 다른 분위기겠다 싶었다.



결혼을 하고 신행을 다녀온 후 얼마 안 있어 바로 추석이었다. 평소에는 왕래도 하지 않는다는 남편의 큰 외삼촌댁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방문했다.

당시 그 댁에서 시외할아버지를 모시고 계셨기에 외손주며느리가 인사를 드리러 간 것이다.

연세가 있으셔서 거동이 많이 불편해 보이셨고 자식들과 함께 어울리시는 것이 아니고 마치 골방 같은 곳에 홀로 계셨다. 그 모습이 왠지 버려진 뒷방 노인네 같아서 좀 처량해 보였다.

아무튼 인사를 드리고 방에서 나와 거실로 나와보니 시어머님 친척분들로 북적북적했고 시아버님은 이미 술독에 빠진 상태셨다.

시아버님은 술이 한 잔 들어가면 술이 술을 마시는 타입이라, 도대체 이곳에서 언제까지 있어야 할지 막막했다.

점심부터 시작된 술상은 저녁식사를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름 새색시라고 한복까지 입고 있었는데 누구 하나 말상대할 사람도 없고 살갑게 다가오시는 어른도 없었다.

그때는 남편도 어렸어서 나를 살필 여력도 없어서 그저 나는 그곳에서 ‘존버’ 중이었다.

참 불편했던 첫 명절의 기억




두 번째 추석 때는 내가 임신 5-6개월 정도였다.

입덧은 끝났지만 슬슬 허리도 아파오고 몸도 무거워지는 중이었다.

명절을 앞두고 걱정을 하는 내게 남편은 말했다.


“우리 집은 명절 준비할 게 없어.

어차피 찾아올 친척도 없어서 음식 준비를 거의 안 해. “


“아 그래?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추석 전날에 시댁에 도착하니 시어머님이 어느 드라마에 나온 장면과 똑같이 나에게 선물이라며 건네신 것이 바로 앞치마였다.

그 옷 입고 내일 명절 준비를 빡세게 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아버님은 교직에 계셨던 분이라 굉장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셨다.

항상 여섯 시쯤 기상을 하시고 일곱 시에는 아침식사를 하는 집안 분위기였다.

식사 준비를 하실 때마다 시어머님은 항상 나를 옆에 세워두셨다.

딱히 나에게 일을 주지도 않으셨다.

나는 그저 어머님이 일을 하실 때 옆에서 지켜보다가 눈치껏 도우미를 해야 하는 거였는데 나도 결혼 전에는 집안일을 안 해봐서 뭘 어찌 도울지 일머리도 없었다

( 그때는 내가 봐도 내가 좀 답답하기는 했을

것 같다. -_- )

아무튼 이른 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잔 마시고 이제 본격적인 추석 준비가 시작되었다.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나물 무치고 생선 굽고 할 테니 너는 전만 부치면 돼.”

“네..”


남편이 말한 대로 찾아올 가족도 없이 나포함 다섯 식구 먹을 건데 ‘그 정도는 뭐 우습지’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머님이 꺼내오신 재료를 보니 기가 찼다.

두부 전, 호박전, 동그랑땡, 생선 전, 육전..

나는 뭐 우리가 어디 전집이라도 차린 줄 알았다.

혼자 밀가루를 무치고 계란을 무치고 , 부치고 부치고 부쳐도 끝이 안 났다.

개미지옥이 아니고 전지옥..

가만있어도 허리가 틀어질 것 같았는데, 쪼그려 앉아 기름 냄새를 끝도 없이 맡아가며 그러고 있으니 ‘이거 정말 나 시집살이시키려고 일부러 이러시나’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 시각 남편은 시아버지와 둘이 티브이를 시청하며 세월아 네월아 밤껍질을 깎고 있었다.

몇 개 되지도 않는 밤을 둘이서 할 일인지..

밤을 다 깎고는 거실에 벌러덩 누워서 발을 까딱이며 티브이 보던 남편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질 않는다.

그때는 나도 참 미련하기도 했고 시부모님이 어렵고 무서워서 남편에게 도와달라는 말도 못 했고, 님편도 그렇게 눈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 끝나니 오후 네시쯤 됐다.

어머님이 생색내듯 말씀하셨다.


“기름냄새 많이 맡았으니 잠깐 바람 좀 쐬고 와라.”


남편과 같이 나가서 남편에게 쏘아붙였다.


“너네 집 명절에 할 일 없다며!!!

그렇게 할 일이 없어서 내가 하루 종일 전만 부쳤냐!!!!


남편은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이상하네.. 원래 우리 이렇게 안 해 먹는데…”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봤자 분은 안 풀렸다.

그리고 서러웠다.

내가 결혼 전에 우리 엄마를 이렇게 도왔더라면 우리 엄마가 덜 고생스러우셨을 텐데 남의 집에서 남의 가족들과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감정이 느끼는 내가 철이 없었지만, 솔직한 그때의 나에게 시댁식구들은 철저히 남이었다.

앞서 썼던 글에서 보듯 입덧할 당시에 누구 하나 걱정해주시는 커녕 매일 안부 전화 안 한 일로 혼나기도 했고 전을 몇 시간 부쳤는데 수고했다는 말 대신


“원래 임신해서도 몸을 많이 움직여줘야 한대.

가만히 있으면 뱃속에서 애가 커서 안 좋대.

원래 애들은 적게 낳아 크게 키우는 게 맞대. “


이러시는 어머니에게서 나를 진심으로 위하시는 마음이 1도 안 들었다.

왜냐면 우리 엄마는 나를 그렇게 대하시지 않으시니까.

엄마였다면 방에 들어가서 쉬라고 하셨을 테니까.

저녁에 식사를 하던 중에 남편이 한마디 했다.


“엄마! 무슨 명절 준비를 이렇게 많이 했어요?

우리 원래 이렇게 안 먹잖아요. “


“응??? 아니.. 얘가 무슨 소리야?

우리 원래 이렇게 먹지~~”


나중에 친정엄마한테 그런 얘기를 하니 엄마는 그러셨다.

많이 만들어 자식들 싸주고 싶어서 그러신 거라고.

또 한편으론 며느리 보란 듯이 그러셨을 수도 있다고.

뭔가 며느리 앞에서 으라짜짜(?)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고, 또 본인 아들도 이렇게 잘 챙겨 먹이라는 메시지도 있을 수 있다고..

진정한 의도가 뭐였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 마음속 어디에도 임신한 며느리를 아끼는 마음은 전혀 없었다는 거.

그게 서운했던 거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따뜻한 말 한마디나 아니면 하다못해 수고했다고 등이라도 한 번 토닥여줘 주셨다면 나의 힘듦의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소소한 말 한마디나 작은 행동 하나는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