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식린이이다.
내 손에서 죽어나간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사람도 다 자기의 취향이 다르고 식성이 다르듯이, 식물들도 자기네들의 취향이 다르다는 것을 몰랐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때 남편은 ‘가장 가성비 좋은 인테리어는 식물이다.‘를 연발하며 식물들을 계속 사드렸다.
그때는 몰랐다.
그 아이들 하나하나에 눈을 맞추고 적당한 때에 적당한 것을 줘야 하는 일이 나의 몫이 될 줄을
남편은 그냥 ‘사기만 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크고 작은 것들을 사다 모으다 보니 어느덧 30개가 넘었다.
그때 나는 식물들에 대한 최소한의 기초지식도 없었다.
누구나 다 키운다는 ‘다육이’의 특성도 몰랐다.
다육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무관심이 더 득이 될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그 아이들은 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나는 생각날 때마다 자꾸만 물을 줬다.
그게 나의 관심이고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자꾸만 물을 주니까 어떤 아이들은 힘을 잃고 이파리가 툭! 툭! 떨어졌다.
도무지 원인을 몰랐다.
“내가 맨날 물도 주고 관심도 주는데 왜~~ 왜~~ 왜 그래~~ ”
하고 물어보았지만 답을 주지 않았다.
나의 지나친 관심과, 받을 수 있는 만큼 이상의 과한 사랑이 그 아이들을 죽게 만든 것이다.
두 번째 실패 케이스는 ‘흙’때문이었다.
화분에 물을 주다 보면 물이 흘러내려가면서 흙이 어느 정도 빠져나가기도 하고, 흙먼지로 날아가기도 해서 화분의 흙높이가 점점 낮아지는데, 그때 흙을 보충해줘야 한다.
나는 양분이 있는 새로운 흙으로 채우지 않고, 죽은 아이들의 흙을 버리지 않고 모아뒀다가, 그것으로 보충해 줬다.
그런데 그중 상태가 안 좋은 흙이 있었나 보다.
기존에 죽은 아이가 무슨 병에 걸려 죽었다면 그 흙도 오염이 될 수 있는가 보다.
그런 것을 모르고 아무에게나 아무 흙을 주다 보니 그것도 아이들을 먼 곳으로 보내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에너지가 고갈되면, 아무것으로 대충 채울 것이 아니라 오염되지 않은 깨끗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채워야 하는 것이다.
식물이 키우다 보니 식태기도 왔다.
권태기도 아니고, 식태기.
처음에는 싹이 나고 이파리가 진해지는 것이 너무 귀하고 예뻤는데, 어느 순간 더 이상 새롭지가 않았다.
귀차니즘이 슬슬 올라왔다.
물을 주는 텀이 길어졌다.
그러다 보니 햇빛에 더 많이 노출되는 아이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미웠다.
처음에 아이들을 대할 때 시든 이파리를 가위로 잘라주며 아플까 봐 덜 덜 떨던 나는 더 이상 없다.
나는 이제 가지들을 마구잡이로 자르는 무참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뿌리만 쬐~끔 남겨놓고 다 잘라버렸다.
사실 ‘죽으려면 죽어봐라’하는 잔인함도 내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더운 여름이 가고 초가을의 시원한 바람을 쐬고 비를 맞으며 다시 삶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
보이지 않던 뿌리 부분에서 살기 위해 양분을 최대한 흡수하고, 자기가 살기에 적절한 계절에 다시 살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뿌리가 죽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 아니다.
내 삶에도 크고 작은 흔들림과 어쩌면 나를 앗아가 버릴지도 모를 만큼의 잔인한 가위질이 있을 수 있지만, 내 뿌리가 단단하다면 결국 나는 다시 살 수 있다.
남에게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나 자신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뿌리를 만들어야겠다.
무식한 보호자를 만나 고생했지만, 결국 살아내고 있는 아이들.. 고맙고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