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연 Jun 29. 2022

오지호의 개성 시절 그림

밝고 맑은 공기와 색채

오지호 <도원풍경>, 1937, 캔버스에 유채, 50x60.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光의 躍動! 色의 歡喜! 자연에 대한 감격– 여기서 나오는 것이 회화다. 만개된 복숭아꽃, 외얏꽃, 그 사이로 파릇파릇 움트는 에메랄드의 싹들! 섬세히 윤택히 자라는 젊은 생명들! 이 환희! 이 생의 환희!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1938) 중 <도원풍경>에 붙인 글


보자마자 좋아하게 되는 그림이 있다. 오지호의 <도원풍경>(1937)이 그랬다.

분홍색 꽃이 핀 복숭아나무, 하얀색 꽃이 핀 자두나무가 가득한 밭이 전경에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뒤편으로는 파란색 지붕, 초가지붕, 갈색 지붕이 보인다. 그 뒤로는 산이다. 앞쪽 산은 빨강, 노랑, 청록, 분홍, 초록, 검정 등 다양한 색으로 표현이 되었고 뒤로 갈수록 푸른색 위주로 채워졌다. 해가 지는 것인지, 뜨는 것인지 산 뒤로 빛이 어숨푸레 비친다. 아, 해가 쨍하고 뜨지 않은 어두운 하늘빛을 받아 산이 파랑인가. 나무에 그득그득 핀 꽃들은 환한 낮이 아니어도 빛이 나고 눈길을 사로잡는 법이지.


나는 한국 어디에서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있을까 하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는데, 딱히 기억에는 없다. <도원풍경>은 그가 개성에 살 때 그린 그림이라 한다. 오지호는 1935년 김주경의 소개로 송도고보에 부임하여 개성에서 10년간 머물렀다. 이때 둘은 한국 최초의 컬러 화집인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을 발간한다. 오지호의 작품 세계에서 개성 생활은 중요한 기점이다.


오지호는 19살 때 고려미술원에서 김주경을 만났는데 둘 다 동경미술학교에서 유학했다. 1928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김주경은 한국으로 돌아와 심영섭, 장석표, 박광진과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그룹인 '녹향회'를 조직하였는데, 1931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오지호가 여기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5년 개성에서 함께 일하던 오지호, 김주경은 인상파 화풍의 한국적인 풍경을 그려내고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다. 그 결과물이 『오지호, 김주경 2인 화집』이고, 그 안에 실린 두 사람의 논문 「순수회화론」(오지호),「미와 예술」(김주경)이다.


오지호 <남향집>, 1939, 캔버스에 유채, 80×6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오지호가 "나의 작품 활동에 문을 연 그림이야."라고 밝힌 <남향집>(1939) 또한 개성에서 그린 그림이다. 큰 나무가 있는 집 문간으로 빨간 원피스를 입은 어린아이가 보인다. 나무 아래서 낮잠을 자는 하얀 강아지도 있다. 오지호의 제자 김성부가 쓴 논문(최선정의 논문에서 재인용)에 따르면 이 그림은 오지호가 살았던 개성의 초가집을 소재로 한 것이며, 문을 열고 나오는 소녀는 둘째 딸 금희이고 담 밑에서 졸고 있는 흰 개는 애견인 '삽살이'라고 생전에 증언했다고 한다.


이 그림에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띄었던 것은 나무 그림자였다. 어린 시절 설날에 영암 할머니네에서 본 새벽하늘이 생각났다. 아침 일찍부터 분주한 소리에 눈이 떠져 창호지 문을 슬며시 열면 찬 공기가 나를 덮치기도 전에 새파랗게 짙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솜이불에 몸을 숨기고 한참을 바라보던 기억이 난다. 그림 속 나무 그림자는 하늘색, 짙은 파란색, 연보라, 진보라의 붓터치로 표현되었는데, 노란 토벽 위로 드리운 그림자에는 보라색이 더 섞였고, 흰 벽 위 그림자는 더 푸르다.


오지호는 자신이 개성에 머물던 시기를 오직 교육과 사색에만 몰두한 가장 아름다운 세월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개성으로 가기 전까지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동화백화점의 광고부에 들어가 선전부장으로 일하기도 하고, 1 반쯤 세탁소운영 하기도 했다. 일본인 인구가 25% 달했다는 식민지 도시 경성에서 아름다운 자연 풍광으로 이름난 개성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평생의 벗과 그림을 그리고 연구하며 사색에 몰두할  있는 생활으로의 변화는 컸을 것이다.


오지호의 개성 시기 그림들을 보면 내 주위의 공기가 달라지는 것 같다. 내가 속한 거대한 공간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과거를 보는 듯도 하다. 짙고도 가볍다. 균형이 훌륭한 생활 속에서만 찾아지는 경쾌함도 상상이 된다. 그러고 보니 이 그림 자체가 내 인생의 귀감이 아닌가도 싶다.


[출처]

최선정,『1930년대 우리 화단의 향토색 논의와 오지호』(2017.2.)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작가의 이전글 수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