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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녜스 Apr 29. 2021

TV와 친구가 되다

고맙다 OTT

거침없는 시간 따라 봄날은 잘도 간다.

만물이 소생하여 화려해진 4월이면 영국 시인 T.S. 엘리엇의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라고 시작하는 The Waste Land(황무지)의 시구를 떠올리는 건 시 속에 담긴 절망보다 부활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있어서인가?

어쨌든, 시대적 상황은 다르지만 4월이 시작되면 읊게 되는 이 시의 첫 행처럼 4월은 우리에게 충분히 잔인한 달이다.

제주 4.3 사건, 4.16 세월호 참사, 4.19 혁명, 고난과 투쟁의 시간과 비극, 기억해야 할 슬픈 사건들이 관통되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함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픈 기억과 봄날의 눈부심이 어우러진 4월이 간다.

무르익은 봄빛에 연둣빛 잎새는 짙어가 한 뼘 더 자란 나무들은 점점 풍성해진다.


시간의 흐름은 변화를 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 같아도 내가 변하면 모든 게 변한다는 말처럼.

나의 일상이 전환된 건 구독형 OTT(Over the Top)를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었음이 분명하다.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지난해부터 OTT 열풍이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평소 TV 하지 않았고, 그나마  선호 채널도 다큐멘터리나 세계테마기행, 스포츠 등 편파적인 시청자로서 넷플릭스나 왓차, 웨이브, 티빙 등등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에 대한 호기심이 그다지 발동하 않았다. 또 절차가 필요한 번거로운 부분에서는 진행조차 멈춰야 했으니까.


그런 요즘은 넷플릭스에 푹 빠져 산다. 국내외 편을 가르지 않고 인기 드라마, 영화, 시리즈물 등등 볼만한 콘텐츠를 찾아 헤맨다.

이렇게 된 배경에 그간 떨어져 지냈던 아들의 귀국과 더불어 받은 혜택이랄까? 엄밀히 말하면 아들이 첫 월급을 받은 기념으로 우리에게 초대형 신형 TV를 선물했다. 젊은 피를 가진 아들의 등장은 신문물에 대한 무반응+지독한 기계치인 우리 부부의 무지함을 순간에 깨우치는 마법의 공식을 보여주었다.

암튼, 시간이 갈수록 넷플릭스가 좋아지는 것도 내 취향 따라 골라보는 재미도 재미지만, 기다림 없이 언제나 시즌 전편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다는 이 나의 체질과 맞아떨어졌.

늘그막에 주야장천 TV와 친구가 되어 몸처럼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이야. 아무튼 이런 모양새는 싫증이 나기 전까지 이어지겠지만 매번 새로 출시되는 콘텐츠가 만만치 않아 나의 또 다른 취미가 될 듯싶다.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흥밋거리나 좋아지는 것이 생기는 건 즐거운 일이다. 동시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다는 것도 느낀다. 어찌 보면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다.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런 일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자신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깨닫기도 한다. 열정이니, 실력이니 따져가며 억지로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고, 적당한 선에서 자신과 타협하고 무리하지 않는다. 정 하기 싫은 일은 안 하면 된다. 이것도 나이듦의 장점이라면 장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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