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일한다는 것의 무게
직접 있었던 이야기일지 아니면 그저 허구에 불과한 이야기일지 알아맞춰보세요? 라는 듯한 질문을 좋아합니다. 정말 있었던 일이라고 해도, 이거 소설이에요라고하는 무적의 논리. 정말 없었던 일을 사실처럼 이야기하는 그들의 재능이 퍽 부럽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소설이 삶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근에 하던 일에 변동이 있어서 급작스럽게 글을 잡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떠올려지는데로 써보려고 합니다. (사실 에세이보단 소설이 쓰고 싶은 사람입니다.)
22년 11월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커피 향이 먼저 스쳤다.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하는 것 마저 건조하다. 인사에 화답해주는 목소리마저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내 책상위에 말라비틀어진 다육식물을 흘깃 쳐다본다. 입사 축하 선물로 작게 받은 것이었다. 나는 이 선물마저도 잘 관리하지 못했다고 잠시 생각한 뒤 자리에 앉아 데스크탑의 전원버튼을 누른다.
"왔냐?"
그 앞에는 돼지가 서 있었다. 양손에 커피 두 잔. 하나는 내 것이었다. 돼지는 나보다 한참 전에 입사해서 일하고 있었다. 처음엔 친해지기 어려운 사이였지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몇번 탕비실에서 마주치고 인사를 건내다 보니 내적 친밀감이라도 생긴 모양이다.
“어이. 잠 못잔 얼굴이네? 이거 마셔라.”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밝은 얼굴이지만, 커피잔을 건네는 손끝이 아주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 작은 변화를 알아채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같은 팀도 아니지만 돼지는 늘 이렇게 사람들을 챙기는 역할을 맡아왔다. 분위기 메이커, 완충재, 조정자. 누가 그런 역할을 맡아달라고 한 적은 없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돼지가 그 자리에 있을 거라 당연하게 여겼다.
회의가 시작되자 상사는 자료가 늦어진 이유를 물었다. 침묵이 길어지는 가운데, 신입 민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제가 정리를 조금 늦게 해서… 죄송합니다.”
나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일정 자체가 이미 촉박했고, 이번 프로젝트는 누구라도 버거웠을 거였다. 그런데도 민재는 스스로 그 무게를 짊어지려 했다.
그때 돼지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 그 부분은 제가 체크를 잘못했습니다. 일정 조정도 제가 했던 부분이라… 재조정해서 오늘 2시까지 보고드리겠습니다.”
눈길이 돼지를 향했다. 상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회의는 그대로 흘러갔다. 모두 자연스럽게 결론을 받아들였지만, 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또 너야, 돼지녀석. 직접 책임질 사람이 지게하라고...’
회의가 끝난 뒤 팀장은 나를 조용히 불렀다.
“돼지가 이번 프로젝트를 많이 끌고 가고 있어보이지? 뭐 열심히는 하지만 혼자 업무를 다 돌리기는 아마 벅찰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에서는 묘한 씁쓸함이 일었다.
‘벅찰거다’는 말의 이면엔 명확했다.
‘무게를 나눠 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다.
며칠 사이에 돼지는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다.
민재에게는 여전히 친절했고, 회의 때는 분위기를 살리려고 억지로 농담을 던졌지만, 웃음이 오래 남지 않았다.
야근을 반복하던 어느 날, 늦은 시간 사무실 불이 남아 있어 들여다보니 돼지가 A4 두께만 한 자료를 붙잡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안가?”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가야지. 먼저가라."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익숙한 기색을 읽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고집과 ‘도움을 요청하기는 어렵다’는 체념이 뒤섞인 톤.
그 말의 기저에 깔린 진짜 뜻은 뻔히 보였다.
‘나 혼자라도 이걸 감당해야 한다.’
다음 날 새벽, 회사의 후배에게 문자가 하나 왔다.
“선배님, 돼지선배가 했던 프로젝트 문제 생겼데요. 저희 측에서 도맡아서 할건 아니지만 아마 당분간 센터에서 조용히 해야할걸요? 아 혹시 저희 지난 결과보고 수정 사항 있으면 출근전에 .... "
문자를 읽는 순간, 마음이 내려앉았다.
돼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책임감을 떠안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그걸 너무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프로젝트 마감 이틀 전, 나는 처음으로 돼지에게 말했다.
“이건 너 혼자 끌고 가는 프로젝트 아니야. 혹시 같이 할만한게 있으면 이야기해”
"네 일 아니잖아?" 돼지가 말했다.
"됐고, 문제가 뭔데" 나는 답했다.
이 말을 꺼내기까지 오래 걸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돼지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밤, 서로 말없이 자정까지 수정 작업을 했다.
대단한 성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마 돼지도 그랬을 것이다.
프로젝트가 문제가 생겼었지만 그래도 결국 예정된 날짜에 마무리됐다.
상사는 회의 말미에 말했다.
“팀워크가 좋네.”
그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문장 속에는 들어 있지 않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팀워크란 단순히 협업이 아니라,
누군가의 무게가 너무 커 보일 때 잠시 대신 들어주는 조용한 행동들의 합이라는 것을.
회의실을 나오며 돼지가 말했다.
“야. 오늘 커피는 네가 좀 사라.”
그제야 나는 그가 조금 가벼워진 걸 느꼈다.
누군가의 짐을 함께 들어주는 순간, ‘같이 일한다’는 말이 비로소 진짜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