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보이지 않는 도시 (극단 서울괴담, 2025)

말이 없는 자를 존재하게 하기

by 세민
[크기변환]표지.jpg

극단 서울괴담의 그로테스크 블랙코미디 <보이지 않는 도시>(연출 유영봉)가 미아리고개예술극장에서 2025년 6.23~6.29 공연되었다. 연극 <보이지 않는 도시>는 도시개발로 오랜 세월 함께했던 집에서 내쫓기게 된 할머니의 좌충우돌 고군분투기를 담은 작품이다. 재개발 피해 주민들과 소통하며 초연 창작이 시작된 <보이지 않는 도시>는 집이 개인의 삶과 기억의 저장고이자 공동체 정서가 깃든 안식처라는 점을 이야기한다.


말이 없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가

[크기변환]세 남자.jpg

공연 시작 전 노란색이었던 달빛은 연극의 시작으로 이내 하얗게 바뀐다. 스산한 분위기의 무대 위에 정장을 입은 세 명의 남성이 서 있다. 반가면을 쓴 인물 두 명은 건물 모형을 아래에 두고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더럽고 낡은 달동네는 인간 문명에 미달하므로 대대적인 조정이 필요하다는 그런 이야기. 그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 남자들은 건물 모형을 하나하나 들어낸다. 옆에 서 있던 전체가면을 쓴 인물은 아무 말 없이 충실히 드러낸 건물들을 쓰레기통에 넣어 폐기한다. 달동네가 사라진 곳에 들어서는 것은 네모 직각의 새하얀 건물들이다. 어쩌면 정장 입은 이들의 말이 옳을지 모른다. 비가 오면 세간 살림이 잠기고 눈이 오면 낙상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는 곳은 사람이 살면 안 될지 모른다. 그러나 정장 입은 남자들은 달동네에 사는 사람을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의 동네를 단지 쓰레기처럼 버려야 할 뭉텅이로 치부할 뿐이다.


[크기변환]도도.jpg

무대가 360도 회전하고 정장의 남성들이 폐기하고자 하는 달동네에 사는 이들로 무대는 전환된다. 집의 주인인 할머니가 등장하기도 전 검은색 털 뭉치 형상의 ‘도도’가 웅크리고 있다. 도도는 방 안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요구르트를 쭉 마신 뒤 벽장으로 들어간다. 쿵. 도도의 벽장이 닫히면 할머니는 방 안으로 들어온다. 할머니는 느리고 천천히 움직인다. 밥을 먹다 말고 택배를 받고 여행 가방을 싸기도 한다. 와중에 도도는 할머니 몫의 요구르트마저 뺏어 먹지만 할머니는 신경 쓰지 않는다. 밥을 먹는 시간은 연극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무한한 일상처럼 느리고 천천히 이어진다. 할머니의 일상에 말은 끼어들 곳 없고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하다.


풀벌레 소리가 멈춘 것은 공사장 작업복을 입은 고수가 마당에 자리 잡은 이후였다. 산동네에 마지막으로 남은 할머니 집을 파괴하기 위해 세 명의 인부가 무대에 들어와 러버콘으로 경계를 나누고, 할머니를 달래고 설득하고 겁주고를 반복한다. 무대의 여러 문과 구멍을 활용하여 도도와 할머니는 이리저리 도망갔다가도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어딘가 어설프고 우스운 광대 분장을 칠한 인부들과 할머니가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은 촌극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집 부수러 온 용역을 마주하는 것은 하나도 재미있지 않다. 최저시급보다 좀 더 많은 일급을 받기 위해 용역 나가는 사람과 그걸 용인하는 경찰에게 나의 공간과 몸이 짓밟히는 일은 조금도 유쾌하지 않다. 달동네를 모형 취급하며 집게 손으로 들어내는 사람들은 달동네를 부수는 것조차 직접 하지 않는다. 두 집단의 공간은 같은 무대를 쓰면서도 엄격히 분리되어 있다. 이 과정이 코미디로 표현되지 않았다면 관객은 연극 보기를 지속하기 벅찼을 것임을 생각한다.


전체 가면을 쓴 도도와 할머니는 연극에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바로 보이지 않는 자들일 것이다. 연극 <보이지 않는 도시>는 가면을 활용해 말할 수 있는 자와 말하지 못하는 자를 구분한다. 전체 가면을 쓴 할머니와 도도, 그리고 연극 첫 장면에 등장한 두 자본가의 하수인은 말하지 않는다. 반면 반가면만 쓴 자본가와 가면 없는 인부들은 말할 수 있다. 말하지 않는 자가 연극이 조명하고자 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의문이 앞선다. 말하지 않는다고 보이지 않는가.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가. 왜 말할 수 없어 보이지 않는 자들을 존재한 적조차 없었던 것처럼 취급하는가. 풀벌레 소리만으로 가득 찬 할머니의 식사 장면을 생각해 본다. 단지 하루의 일상을 충실히 보내는 사람들. 우리 삶은 인간극장이 아니니까, 사는 행위에 구태의연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다. 용역이 닥치기 전까지, 할머니와 도도의 삶은 그 자체로 완전했다. 그것이 완전하지 않다고 해버린 것은 갑자기 들이닥친 외부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도도와 할머니, 그리고 우리 관객들

연극 <보이지 않는 도시>에 등장하는 도도는 무엇이었을까. 도도가 처음 등장할 때 나는 집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이해했다. 요구르트를 주는 것이 일종의 의례로 보였기 때문이다. 도도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도도의 운명은 집과 함께한다. 도도의 존재는 할머니의 집이 할머니만의 것도, 개발업자의 것도 될 수 없음을 상징한다. 우리는 돈을 주고 무언가를 사는 행위를 통해 대상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일 뿐이다. 달동네는 도시에 선행했다. 70~80년대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인구로 서울은 과밀해졌고, 적정 주택의 공급은 수요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은 ‘무허가’라는 이름으로 살 곳을 마련했고, 원활한 노동력의 수급이 필요했던 정부는 무허가 주택가에서 사는 노동력을 묵인하는 방식으로 주택 정책을 대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손과 발과 땀으로 우리 사는 곳을 만든 사람들이 빽빽이 존재한다. 도시 개발이라는 것이 누구에게 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나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크기변환]달.jpg

할머니의 짐은 결국 인부들의 손에 의해 마당으로 끌려 나온다. 자개 화장대와 도도가 드나들던 장롱 하나를 빼니 집이 텅 빈다. 남에 의해 엉성히 쌓인 여행 가방 하나를 들고 할머니는 집을 나온다. 마당을 건너 할머니는 기둥 위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명품 아파트’ 표지판 앞에서 길을 잃는다. 할머니는 자신이 갈 곳도, 머물 곳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내 사다리를 타고 자신의 집 지붕 위로 오른다. 어딘가에 오르는 행위는 높은 곳에 서는 것임에도 위태롭게 자신을 고립시키는 일이 되곤 한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 즉 수평의 길이 막혔을 때 어떤 사람들은 수직으로 올라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달이 있는 곳으로 오른 할머니 앞에 집 벽지에 숨겨져 있던 가족사진이 나타난다. 할머니에게 그 집이 가진 의미를 동화적으로, 또 마술적으로 보여준 순간이었다.


[크기변환]커튼 콜.jpg

지붕에 오른 할머니와 가족사진을 확인한 인부들은 정답을 찾았다는 표정으로 관객석에서 할머니의 가족을 찾아낸다. 무작위로 오는 관객들이 정말 가족일 리는 없다. 비슷하게 생긴 또 다른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무대가 한 바퀴 돌 때마다 가족은 늘어나고, 관객과 할머니는 갑자기 생긴 가족 역할을 자연스럽게 수행하기에 이른다. 할머니의 한을 풀어주었다고 생각하는지, 새롭게 가족사진을 찍은 이후 집은 폭삭 무너진다. 마침내 달동네의 마지막 집이 사라진 것이다. 헛헛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집은 무너졌고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생전 모르는 사람들과 찍은 가족사진 하나 건네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어지러운 아파트 표지판 앞에서 다시 길을 잃을 것이다. 그럼에도 극 설정상 무대에 언제든 들어갈 수 있는 관객들은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는 것. <보이지 않는 도시>를 본 우리들은 언제든 말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연극을 보고 나와 들어가는 곳이 또다시 이 도시가 없는 셈 치는 곳이라 하더라도.


매거진의 이전글[연국] 유령 (고선웅, 2025 세종문화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