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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의 위성 Jan 25. 2021

네? 국경을 다시 넘으라고요? (2)

페르피냥을 아시나요


띵!


 아직도 그 소리를 잊지 못한다. 아침에 씻고 로션을 바르고 있던 참이었다. 거의 마무리될 때쯤에, 경쾌하지만 나에겐 불길하게 다가온 메일 알림음. 쿵쾅대는 심장과 떨리는 손으로 폰을 켜자 답신이 와있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영국 국경 밖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야 한다는 소리였다.


 당혹감과 억울함이 반반씩 자리를 차지했다. 내가 무얼 잘못했지? 올바른 비자 도장을 달라고 이야기했고, 몇 번이나 재차 확인했으며 그들이 맞다고 했다. 내가 거기서 무엇을 더 했어야 했을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해야 했다. 타국살이를 하면서 배웠던 것 중 하나는 모든 일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한국에 있는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하소연은 할 수 있을지언정 문제 해결은 그들이 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정돈된 감정으로 단 몇 줄로 요약했지만, 당시엔 서술한 것 이상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실이 엉켜서 울고 싶은데, 집중해서 풀어야 하는 상황이어서 울 수도 없는 느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은 계획에도 없던 주말여행이었다.


 그때의 나는 개강 전이었지만, 이미 영국 학교 기숙사에 들어와 있었다. 학교 측에서 마련해주는 여러 환영행사에 참여하며 친구들을 사귈 즈음이었다. 물론, 학교에 가자마자 (학교에 가기 전에도 메일로) 수차례 비자 도장에 관해 문의를 했었다. 그들은 확답은 주지 않았지만 아마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결론은 재입국이었고, 나는 곧장 비행기표를 찾아 헤맸다.


 불행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국 학교에서 그 사이 친해진 친구들이 같이 여행을 가자고 해주었다. 학기 중에 여행할 생각이었는데, 기왕 이렇게 된 거 빨리 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어떻게 너 혼자 보내겠냐며 친구들은 내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곧바로 스카이스캐너로 온갖 검색을 돌렸다. 주말, 1박 2일, 비교적 가까운 거리, 저렴한 비행기 값.


그리고 이 모든 조건에 얼추 부합한 곳은




페르피냥이었다.






 페르피냥? 처음엔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정확히 몰라서 헤맬 정도로 처음 들어보는 지명이었다. 프랑스의 남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영국에서 두세 시간쯤 비행을 하면 도착한다. 공항 역시도 정말 작은, 소도시였다. 활주로에서 내려서 조금 걸어가다 보면 바로 건물이 보인다. 건물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거기서부터  입국심사대 줄이었다. 되게 작은 공항이네, 신기하다. 하면서도 입국심사만 하면 약간의 노이로제가 걸린 상태여서 긴장이 되었다. 친구가 먼저 입국심사를 받았고 뒤에서 다른 친구와 힐긋 보는데 꽤 오래 걸려서 의아했다. 하, 참 쉬운 게 없다며 구시렁대다가 곧 내가 입국심사관 앞에 서게 됐다. 나한테는 별 질문 없이 도장을 찍어주길래 나오자마자 친구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나한테 프랑스어로 묻더라."

"뭐라고?"

"북쪽? 남쪽? 이렇게."

"헐..."


 내가 먼저 심사를 받았으면 멘붕이었겠다 싶었다. 다행히 친구는 프랑스어를 교양으로 들은 적이 있어서, 그녀의 질문을 얼추 알아들었고 남쪽이라고 대답했다. 한 번이라도 쉬운 적이 없다며 우리는 툴툴대며 공항 밖으로 나섰다.



해변으로 향하는 길.


 그렇게 공항에서 나와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페르피냥의 한 해변에 도착하게 된다. 우리 세명의 숙소 기준은 한 번에 통일되었는데 바로 '바다 앞에 잡자'였다. 체크인 시간보다 이르게 도착한 우리는 카운터에 짐을 맡기고 곧장 바다로 나섰다. 그렇게 도착한 페르피냥의 바다는 푸르디푸르렀다. 불안함과 걱정이 한 칸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바람이 꽤 거세게 불었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떨쳐버리라는 듯 나에게 와 부대꼈다. 머리칼이 여기저기 하늘에 길을 내었고 기분이 슬그머니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때쯤의 우리는 영국에 얼마 있지도 않았지만 영국 음식에는 이미 질려버린 상태였다.


도대체 이 가격에 이 맛이 어떻게?


 영국 음식은 정말 의문투성이었다. 게다가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고.


 그리고 우리는 프랑스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이 곳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공항에 있던 빵집부터, 바닷가에 열려있는 가게가 몇 없어 아무 생각도 기대도 하지 않고 들어온 카페도 썩 괜찮았다.


"우리 내일 이 시간에는 공항에 있어야 해."

"소름. 진짜 1박 2일은 당일치기랑 비슷하다니까."


숙소로 향하는 와중에 점차 해가 지기 시작한다.


 카페 안에서 내일 집에 돌아갈 일정을 잡으며 놀다가 체크인 시간에 맞춰 호텔로 돌아왔다. 동년배들이라면 다 부르는 러브하우스 배경음악을 입으로 깔며 호텔방 안으로 들어섰다. 페르피냥의 숙소는 한국인의 후기를 찾기가 힘들어서 또 선택지가 많지 않아 지르는 심정으로 예약한 곳이었는데, 생각보다 쾌적했다.


베란다뷰가 예술이던 숙소.



 우리는 저녁과 조식을 포함한 숙박을 예약한 참이었고, 이 곳 사람들이 맛잘알이라는 데 모두의 의견이 모아지는 와중이었기에 잔뜩 기대를 한 채 일몰을 지켜보았다.



노을을 머금은 하늘



 일몰은 오래, 느리게 진행되었다. 당신이 충분히 이 분홍빛을 누리라고. 주황과 분홍과 약간의 푸름과 선선함과 벽돌과 노을을 누리라고. 당신이 여기 오게 된 것은 우연일지 모르나, 지금부터는 운명처럼 믿게 해 주겠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엎질러진 물을 수습하는 것처럼 떠나온 여행이었는데 지금부터는 그렇지가 않았다. 오롯이 그곳의 내가 행복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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