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문제
나는 여태 본가에서 쭉 자랐다. 초중고, 대학교까지 부모님과 함께 거주했다. 그러니까, 나는 스스로 살림을 온전히 감당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별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부모님이 챙겨주는 게 너무 당연해서, 내가 교환학생을 가서 혼자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닥치기 전에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처음에는 식기구를 사고, 내 공간을 채우니 뿌듯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매일 메뉴를 정하고 밥을 해먹을 생각을 하니 재미있을 것 같았다. (여담이지만 무조건 밥을 해 먹고살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영국 외식 물가는 정말 비쌌다. 캠퍼스 내에 있는 식당들도 비쌌다. 한국 학식과 가격이 비교 불가다. 맛도 비교 불가다. 우리 학교(한국) 학식도 딱히 맛있다고 느껴본 적 없는데, 영국 학식은 상상 이상이다. 게다가 이 가격 주고 이 맛을? 이라는 생각 때문에.. 친구들과 점심 먹을 때 말고는 잘 먹지 않는다.)
그런데 밥 해 먹고사는 일은 보통이 아니다. 장도 봐야 하고, 밥 먹을 시간 맞춰서 요리도 시작해야 하고, 먹고 치워야 하니 말이다. 특히 약속 없는 주말에는, 점심 먹고 뭐 좀 하다 보면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엄마랑 전화를 하면서 삼시세끼 해 먹는 것도 바쁘다고 밥하다 하루 다 간다고 하니까 엄마가 킬킬대며 좋아했다. 드디어 엄마의 말을 이해한 것이어서 그랬을까? 주말엔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 돌리면 끝이라니까, 엄마가 또 웃으며 좋아했다. 그러더니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은 더러워지지가 않아. 어지르는 사람이 없어서 ㅋㅋㅋㅋ"
아 엄마...
하지만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날이 지날수록 한식에 미쳐갔다. 내가 이렇게 '밥'을 좋아했나? 한식에 돌아버렸었나? 한 그릇에 끝나는 파스타나 요리가 아니라 밥 따로 국 따로 이렇게 먹고 싶었다. 아니 그냥 '밥!'이 먹고 싶었다. 밥 그 자체가!
동네 인근에 아시안 마트가 있었다. 하지만 비쌌다. 햇반 한국 가격과 비교하면 비합리적인 가격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때 한식 처돌이가 되어있어서 막 사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타국 살이의 외로움을 음식으로 이겨내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볶음밥도 해 먹지만 밥 그 자체가 좋아서 따로따로 먹는 걸 주로 했다. 인스턴트 국도 활용했다. 내가 이렇게 밥과 국과 김치에 환장했다니.
해장을 무조건 뜨거운 국물로 했던 나는 아시안 마트에서 산 꼬꼬면을 해장템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전날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고 난 다음날 파송송 썰어서 시원 얼큰한 국물을 마시면 속이 다 풀렸다.
그래도 매일 밥만 먹고살 순 없었기 때문에 중간중간에 삼겹살을 사서 구워 먹기도 했다. 고기일 뿐이지만 왠지 한식 느낌이 난다. (김치를 구웠으니까..)
그리고 아침이나 간식으로 요거트랑 시리얼을 챙겨 먹었다. 저 그래놀라가 최고였다. 가격도 저렴한데 바삭바삭하고 달달하니 유제품이랑 같이 먹기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그래놀라가 다 부서져있는 것보다는 덩어리째 뭉쳐있는 걸 좋아하는데 딱 그 타입이었다. 학기 내내 저 그래놀라 시리얼에 정착해서 먹었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냐면,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먹고 싶어서 직구가 가능한지 찾아보기까지 했었다. (이 글 첫 번째 사진에 있는 그래놀라 박스가 내가 말하는 그래놀라다. 빨간색 박스!)
나의 생활을 온전히 감당하면서 느낀 것은 첫째로, 와~ 나 진짜 여태 편하게 살았구나 였다. 부모님이 나의 생활 전반을 다 케어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절절히 느꼈다. 그리고 둘째로, 물리적인 독립도 성장에 기여한다 였다. 주변 친구들을 보면, 아직 경제적인 독립은 이루지 못했어도 기숙사에 살거나 자취하는 애들이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홀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의 일상을 스스로 케어한다는 건 성숙한 일이다. 나는 내가 드디어 한 발짝 나온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