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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의 위성 Jan 18. 2021

오싹한 진품

아우라는 어디에 있나. 분노는 나를 어디로 데려왔는가.

 



그래서 아우라가 도대체 뭔데?



 이 모든 여행의 기반은 한 켠의 분노였다. 나는 대학의 미학강의에서 예술작품과 예술가들을 수없이 맞닥뜨렸다. 교수님들은 그들의 중요성을 외쳤고 나 역시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한편으로는 도대체 느낄 수 없는 것들을 손에 쥐어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에이포 용지에 인쇄된 그림을 보면서, 활자로만 작품을 배우면서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사실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장해서 말하면 명성을 강요받는 기분도 들었다. 교수님과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고, 나의 그때의 비뚤어진 심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다짐했다. 내가 유럽에 직접 가서 나를 괴롭히던 이 모든 작품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 그래서 내가 방문하는 모든 도시의 일정에 박물관과 미술관을 바득바득 넣었다. 그랬기 때문에 파리도 일주일이나 머물게 된 거였다. 가고픈 박물관도 미술관도 넘쳐나서.


 그리하여 파리에선 '오르세, 오랑주리, 루브르, 조르주 퐁피두'를 다녀왔다. 욕심 같아선 로댕미술관, 피카소 미술관까지 다녀오고 싶었지만 앞선 4개만으로도 벅찬 계획이었다. 




두 시간 걷고 겨우 도착한 오르세

 

 파리에서 가장 먼저 갔던 미술관은 오르세였다. 오르세 미술관에 도착해서 내부를 크게 한 번 둘러보고 친구들에게 보내려고 남긴 비디오 파일에는 정확히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 오르세에 왔는데, 뭐 좋고 이런 거 보다 소름이 돋아
이 모든 게 진짜로 실존한다는 게 너무 무섭다


 정말 그랬다. 보통 미술관에는 엄청 유명하고 대표적인 작품이 손에 꼽게 걸려 있지 않나? 마치 '우리 이것도 있다. 아 맞다, 우리 이 작가 작품도 있다? 너네 이거 교과서에서 봤지? 그거 여기 있던 거야. 아 맞다, 우리 이 작품도 있어. 이것두!' 이런 식으로 전시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쏟아지는 작품을 감상하느라 허리와 다리가 너무 아파 좀 쉬려고 하면 다음 섹션 표지판이 나를 계속 유혹했다. 이다음이 모네, 마네인데 쉴 거니? 이것만 보고 좀 쉬자 하면, 반 고흐 표지판이 나온다. 그런 식이었다. 진품이 이렇게 쏟아진다는 게 무서웠다. 실제로 있다는 것이 오싹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미술품들이 너무, 한 공간에 너무 많았다.


 루브르 박물관은 아예  마음을 굳게 먹고 갔었다. 오르세 미술관을 간 날 무려 4시간이나 감상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브르는 그보다 규모가 훨씬 크니 아주 편한 운동화를 신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기대가 무척 큰 상태기도 했다. 오르세가 자신들의 컬렉션을 자랑하듯이 나열해 놓았다면 루브르는 작품의 양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치 미싱으로 작품을 드르륵, 드르르륵 박아놓은 것 같았다. 박물관 자체도 엄청 넓고 컸으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작품을 감상해야 할지 아득했다.


쾌청했던 루브르 앞 풍경


 루브르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작품은 아무래도 '모나리자'일 것이다. 워낙 인기가 많고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직원들이 통제해 가며 감상을 시켰는데 이게 아쉬우면서 웃겼다. '감상을 시킨다'라는 말은 이상하지만 그게 제일 정확한 표현이다. 한 그룹이 들어가면 사진 찍을 시간을 주고 얼른 퇴장시키는 루틴으로 직원들이 관객의 감상을 조율한다. 내가 갔을 때는 비교적 한적했는데도 로테이션 돌리듯 사람들을 들이고 치워버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마주한 모나리자와 눈인사를 하고 나면 금방 쫓겨나 버린다. 그녀는 작지만 밀도 높게 걸려있었다. 하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이것 역시 진짜 있구나, 정도. 이런 게 아우라라는 건가? 잘 모르겠네.


 내 온 정신을 빼앗은 것은 '니케'였다.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나는 그림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조각에는 그렇지 못했다. 견문이 훨씬 얕을뿐더러 나에게 흥미를 끌 요소가 일절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진으로 봐서는 그림보다 더 거리감이 있는 게 조각이었다. 그런데 니케는 달랐다. 유명하니까 관람 루트에 넣어서 보러 간 것뿐이었는데 발이 절로 멈추고 고개가 들렸다. '아우라'라는 건 이런 걸까? 고고하고 아름다운 느낌도 있지만 엄숙하고 경외의 감정이 더 크게 다가왔다. 왠지 무섭기도 하고 스산한 기분이기도 했다. 아우라는 마냥 밝고 선한 느낌만은 아니구나. 알게 되어 기뻤다. 니케 조각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한 30분을 하염없이 바라봤던 것 같다. 딱히 뭘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고개를 들어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니케를 보러 온 사람들이 바뀌고 또 바뀔 때까지.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작가의 어떤 화풍을 좋아하는지 알게 된다는 점이다. 책으로만 봤을 때의 그림의 선호도와는 또 달라진다는 게 재밌었다. 나는 반 고흐의 그림을 좋아했다. 붓터치가 독보적이고 그의 감성이 좋았다. 그가 쓴 글은 더 좋았고. 그런데 실제로 보니까 고흐의 작품보다는 르누아르의 작품이 좋았고, 피카소의 작품은 생각보다 나에게 다가오지 못했고, 모네와 마네의 그림은 여전히 좋았다. 




 조르주 퐁피두는 주로 현대미술 작품이 많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내가 미학을 배우면서 빈번하게 분노했던 지점이 바로 현대미술이었다. 빨간 배경에 검은 줄을 그린 이 그림이 그렇게까지 중요하다고? 해석을 하니 마니, 그 자체가 의미니 뭐니 어려운 관념 투성이었다. 그 앞선 시대의 작품들은 '어디 한 번 얼마나 그렇게 잘 그렸는지 한 번 보자!'의 마인드였다면 현대미술은 '내가 보고 반드시 영 별로라는 걸 입증하리라!'라는 아주 비뚤어진 마음으로 관람을 시작했다. 그건 인쇄물로 봐도 별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퐁피두에서의 목적은 가능한 작품을 다 보자,였다. 별로라고 하려면 볼만큼 보고 말할 만큼 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딱히 기대도 없는 채로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감상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참, 웃기게도 내가 꺾였다. 관람 끝물에 가자 현대미술의 가치를 조금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첫째, 사람을 당황시킨다.

둘째, 이 작품들은 경험하는 거다, 그게 의미의 전부이다. 


 매 섹션을 넘어갈 때마다 혹은 매 다른 작품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는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건 도대체 뭐야.. 이거 뭔데.. 뭐야.. 무서워... 처음엔 이런 식으로 감상을 이어나갔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좀 즐거워지고 기대하게 되기도 했다. 내 관념을 깨뜨려 주는 작품들도 많았고 선입견을 뒤바꾸는 전위적인 작품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새롭고 신선한 경험들이었다. 이를 토대로 생각해보니 현대미술 작품들은 '경험'이 그 의미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규모나 색채로 압도하는 작품들이 있었는데, 그건 정말 배경색과 줄 몇 개 혹은 동그라미 몇 개로 그려진 그림인데도 감정이 느껴졌다. 파리에서 한 미술감상 중 가장 신기했던 경험이었다. 아무런 해석도 할 수 없고 어떤 맥락의 그림인지도 모르지만 감정이 느껴졌다. 분노, 슬픔 그게 뒤섞인 그림. 돌고 돌아 원초로 돌아온 것일까. 교수님이 해주셨던 이야기를 반추하며 그림 앞에서 스스로 숙연해졌다. 미학 수업의 내용이 떠오르면서 비로소 내가 제대로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노가 가져다준 진품 앞의 나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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