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끝내 통하지 않았던 이유
나는 회사가 안 맞는 사람일까?
아니면, 나를 소모하는 방식이 안 맞았던 걸까?
회사에 다니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나는 회사의 고민이 내 고민이 될 때만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대표의 걱정을 함께 고민하고, 회사의 방향을 내 일처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워커홀릭에 가까웠고, 지금보다 훨씬 많이 일했고 열정페이를 받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덜 괴로웠다.
힘들었지만 억울하지는 않았다.
그 시간들이 어딘가로 쌓이고 있다는 분명한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일이 버겁고 싫어지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회사의 고민은 더 이상 내 고민이 될 수 없었고, 나는 결정의 중심에서 조금씩 밀려나 있었다.
그때부터 일은 서서히 다른 얼굴을 했다.
내가 기여한 만큼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내 에너지가 회사만 살찌우는 데 쓰인다는 감각이 들 때, 회사에 대한 애정은 아주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 후로 회사 일은 성장의 수단이 아니라 중압감과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내 삶에서 손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나는 회사가 안 맞는 사람일까?”
“왜 이렇게 회사가 힘들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보자”가 통하지 않았던 이유
주변에서는 흔히 이렇게 말하곤 한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기왕이면 즐겨보라고.
나 역시 그 말에 기대를 걸어보기도 했다.
마음가짐 하나만 고쳐먹으면 이 지옥 같은 풍경도 다르게 보일 거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환경이 어느정도 허락이 되어야 가능한 거더라.
무언가를 즐기기 위해서는 나에게 ‘통제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몰입은 열정이 아니라, 나를 짓누르는 중압감이 되었고, 적절한 보상 없는 헌신은 손실처럼 느껴졌다. 정당한 존중을 받지 못한 기여는 자부심이 아닌 날 선 분노로 쌓여갔다.
결국 나는 즐기지 못했다. 그것은 나의 의지가 유약해서가 아니었다.
내 소중한 에너지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디에 쓰이는지조차 알 수 없는 무력한 환경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저항이었을 뿐이다.
워라밸을 찾게 되는 진짜 이유
그렇게 나는 집요하게 워라밸을 찾기 시작했다.
조금 더 쉬고 싶었고, 조금 덜 쓰이고 싶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원했던 건 워라밸이 아니었다.
“여기까지는 괜찮지만, 이 이상은 넘지 말라”는 마음의 경계선.
워라밸은 목표가 아니라 나를 보호하려는 신호였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당장 회사를 그만둘 수 없는 현실에서 나는 질문 하나를 바꿔보기로 했다.
“이 회사를 어떻게 견딜까?” 대신 “이 시간을 어떻게 내 삶의 페이지로 만들까?”
회사를 위해 소모되는 내가 아니라, 회사의 시간을 나의 성장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으로 태도를 고쳐 쓰기로 했다. 회사의 문제는 회사의 몫으로 남겨두고, 나는 그 소란 속에서 오직 나만이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을 가려내기 시작했다.
사람의 이면을 읽는 눈, 단호하게 나를 지키는 경계의 언어, 무질서 속에서 구조를 파악하는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삼키려는 감정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는 연습.
하지만 머릿속의 명료한 이론과 달리, 현실의 나는 그런 지혜로운 기술들을 감당하기엔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타고난 기질은 주변의 감정을 습관처럼 흡수했고, 결국 분리되지 못한 감정은 독이 되어 돌아왔다.
매일 반복하는 다짐은 어김없이 실패의 연속이었다. 끝내 이성적이지 못한 나 자신을 자책하게 되는 지독한 도돌이표. 순두부같은 나의 마음은 여전히 그 불협화음 사이에서 홀로 애를 쓰고 있었다.
애정 대신, 품위 있는 거리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도 있다.
회사에 애정이 없어서 힘든 게 아니라, 애정을 요구하는 구조가 나를 지치게 했다는 것.
그래서 다시 이렇게 정리했다.
성실함은 유지하되 과몰입하지 않기.
책임은 다하되 정서적 헌신은 하지 않기.
씁쓸한 선택이지만, '그냥 에너지 빼기'
“나는 이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지, 이 조직에 나를 증명할 사람은 아니다.”
이 문장을 마음속에 두자, 조금 편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이런 문장도 결국 매번 무너지는 모래성을 쌓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억지로 버티며 지켜보던 끝에 나는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더 버티는 것이 성장이 아니라 나를 갉아먹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회사를 다니는 방식을 바꾸는 데서 멈추지 않고, 회사를 나가는 선택을 했다.
그 결정은 충동도, 도피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조용한 확신에 가까웠다.
퇴사를 결심하고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몸이었다.
매일 밤 신경질적으로 달라붙던 악몽의 그림자가 걷혔고, 이유 없이 심장을 두드리던 불안의 박동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묘하게 비인격적이었던 공기, 기어이 상대를 깎아내리게 만들던 천박한 감정들의 얽힘, 애정도 존중도 거세된 채 그저 '버티는 것'만이 유일한 미덕이었던 조직에서 발을 빼자, 비로소 마음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 체한 듯 꽉 막혀 있던 마음 속 한 구석이 '툭-' 하고 길을 내어주는 기분, 그건 묵혀있는 시간들에 대한 형용할 수 없는 명료함이었다.
물론 퇴사가 마법처럼 완벽한 미래를 약속해 주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앞날은 안개 속에 있고, 문득문득 낯선 불안이 발목을 잡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벼웠다. 수년간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이제야 내 몸을 감싸던 부정적인 기운을 털어내고 비로소 무엇이든 그려볼 수 있을 것 같은 순백의 마음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도망친 자의 안도감이 아니라, 나를 되찾은 자의 고요한 용기였다.
회사 알레르기, 나를 지키기 위한 알레르기 반응
회사를 떠났다고 해서 곧바로 삶의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불확실하고 때론 막막함이 밀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분명히 안다. 맞지 않는 틀에 억지로 나를 구겨 넣으며 스스로를 의심하던 시간보다, 나를 온전히 이해한 채 다음 스텝을 고민하는 지금이 훨씬 단단하고 건강하다는 것을.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지금 이 순간에도 조직 안에서 서서히 깎여나가고 있다면, 무작정 짐을 싸라는 조급한 위로는 건네지 않겠다. 다만 이것만은 꼭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유독 힘겨운 이유는 당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당신을 소모하는 방식에 스스로를 너무 오래 끼워 맞춰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당신에게도 '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부디 그때의 선택을 끝이라 여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마침표가 아니라, 비로소 막혔던 숨을 깊게 내뱉는 새로운 시작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