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내내 캐럴을 듣고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소품들만 봐도 눈이 돌아가는 나는 크리스마스시즌이 속해있는 계절 겨울을 매우 사랑한다. 추운 걸 싫어하면서도 겨울을 그렇게 애정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면. 일단 크리스마스의 그 화려한 전구들이 예쁘고, 추울수록 다른 곳을 살피고 온정을 주고받는 분위기 속에서 따스함이 느껴져서이기도 한 것 같다. 길거리 곳곳에 주황빛의 전구들은 화려함과 따스함을 함께 빛내는듯하다. 그러니 화려함과 따스함이 공존하는 겨울. 그런 연말의 온도를 너무 애정하기에 느낌으로라도 그 분위기를 그리며 늘 캐럴을 듣고 있는 거다.
암진단 전에도 늘 찬바람만 불어오기 시작하면 트리부터 꺼냈다. 그래도 양심상 11월이 지나서야 꺼내놓고 3월까지 최대 5개월을 예쁜 트리를 감상하곤 했었다. 한여름에 암진단을 받고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들 중에 계절의 아름다운 변화들을 더 이상 감상할 수 없을 거란 아쉬움도 포함되어 있었다. 바쁘게 사느라 계절의 변화에는 크게 민감하지 않았던 나였는데. 역시 한정적, 마지막이란 단어 앞에서는 모든 것들의 의미가 커지기 마련인가 보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예쁜 크리스마스트리를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다!'라는 생각에 하루라도 더 빨리 트리를 꺼내놓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10월 초에 트리를 설치했다. 요즘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굉장히 포용력 있는 시선으로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을 허용해 주는 식구들 덕에 아주 당당하게(올해는 10월 초에도 매우 더웠음에도) 거실 한편에 트리를 설치할 수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매우 편안해진다. 반짝거리는 화려함 속에 주광색의 전구들이 주는 따스함이 마음을 차분하게 감싼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예전에 봤던 심은하, 한석규주연이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가 생각이 났다. 내용이 거의 기억이 안 나지만 극 중 한석규가 시한부 인생을 살다가 마지막에는 죽는 걸로 끝났던 걸로 기억되는 영화였다. 근데 그것과 8월의 크리스마스와는 무슨 연관성이 있었던 거지 싶어 영화를 다시 보기로 한다. 마침 넷플릭스에 있어서 바로 감상했다. 1998년 작품이니까 26년 전 작품이다. 극 중 정원(한석규)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진사이고, 다림(심은하)은 명랑한 성격의 아가씨로 주차단속을 하면서 여러 번 정원과 마주치게 되면서 인연이 시작된다. 여기서 정원이 시한부 인생으로 나오지만 어떤 병명으로 인해 시한부인생을 사는지는 영화 속에서는 언급되지 않아 찾아보니 위암말기로 설정되어 있다고 한다. 수시로 병원에서 가서 약을 타오고, 마지막에 병원에 입원한 모습만 나올 뿐이어서 그 시대 때만 해도 위암말기인 환자가 저렇게 횟집에서 회를 맛있게 먹고 소주를 마시는 게 가능했던 걸까? 혹시라도 음식으로 인한 바이러스감염이 될 경우 굉장히 치명적 일수 있기 때문에 항암환자들은 날것을 먹지 못한다. 그리고 술도 마찬가지. 아마도 그 시대 때는 그런 정보가 없었거나 작가님의 정보가 부족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조금은 아쉬웠고, 암환자를 그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한부인생으로 단정 지어놓은 설정부터 같은 입장의 나는 뒷맛이 좀 씁쓸했다. 아무튼 오랜만에 매우 매우 잔잔한 영화를 봐서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처럼 내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를 좀 더 길게 즐기기 위한 8월(부터)의 크리스마스인가라고 생각했는데 제목과 내용에 큰 연관성은 없어 보였다.
어쨌든 나의 크리스마스는 10월부터 시작이 된 셈이다. 그러고 보면 꼭 어떤 시기에 어떤 상황에서만 어떤 감정들을 용인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다.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아프고 나서 뭔가 삶이 단순화되고 명료해지는 느낌이다. 싫은 것은 굳이 애쓰지 않으려 하고 지금 나의 기분과 느낌에 집중하게 된다.
카르페디엠[오늘을 잡아라]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즐기자라는 것인데. 10월부터 맞이하는 나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설렘도 이런 마음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머리를 빡빡 깎은 후부터 잠깐의 외출에도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중요한 자리에는 가발을 썼지만 잠깐의 외출에는 머리스타일에서 동반되는 갖가지 상상을 상대에게 선사하고 싶지 않은 배려랄까 오지랖 넓은 누군가의 염려 섞인 말을 차단하고 싶어서일까 짧은 머리를 숨기기 위해 두건을 쓰고 그 위에 야구모자를 덮어쓰고 나갔다. 집에선 휑하게 지내다가 두 겹으로 덧씌운 모자에 항상 머리에서는 열이 폴폴 났고 뭔가를 먹었다 하면 여지없이 머리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해서 번거로움이 굉장했다. 그러다 생각한다. 이게 뭐라고 싸고 매고 감추려 하나.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는데. 그런 생각 이후로는 뒤통수의 더벅머리가 그대로 노출이 되든 말든 그냥 모자만 쓰고 다닌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 물어오면 대답하면 되고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 배려니 걱정이니 하면서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카르페디엠. 그렇게 나는 항암의 일상에서 또 나에게 편한 것, 예쁜 것, 함께하고 싶은 것, 소중한 것, 좋은 것들만 곁에 두고 오래오래 즐기며. 더 선명해진 딱 내 입맛대로, 내 스타일대로의 하루, 하루를 채워나가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