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 낭패, 교활

by 송창록

“결정장애”라는 말이 요즘 시대 사람들의 대표적인 행위가 되었습니다. 정보가 홍수가 되다 보니,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습니다. 결정을 못하다 보니 누군가 추천해주면 자기가 보고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이 심리를 파악한 아마존은 고객에게 당신의 패턴을 보니 이 물건이 필요하겠다고 추천합니다. 나의 필요에 딱 맞게 추천해주면 “지름신”이 바로 강림하는 것이지 뭔 수가 있겠습니까. 쇼핑은 과학입니다. 소비자의 “인지적 구두쇠” 경향을 파악하여 “살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듭니다. 우리는 아마존에게 “털리고” 있습니다.


“결정장애”와 화합하는 단어가 여러 개가 있습니다. 신중, 염려, 유예. 신중은 일이 벌어지는 주변 환경과 관계를 고려하여 삼가면서 무겁게 처신하여 조심스럽게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염려는 이것도 생각하고 저것도 생각하다 보니 결과가 어떻게 벌어질 지 몰라서 걱정된다는 뜻입니다. 유예는 선택이나 결정을 해야 하는데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린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일은 생각 – 실행 – 생각 – 실행이 반복되고 연속되는 Chain Reaction입니다. 염려나 유예는 버리고 신중해야 합니다. 양변을 고려하여 가운데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양변의 치우침을 관찰하여 지그재그로 나아갑니다. 한 쪽만 보고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을 무모하다고 하고, 양 쪽을 보고 가운데만 고집하는 것을 우유부단하다고 하고, 양 쪽을 보고 때에 따라 양 쪽을 적확하게 선택하는 것을 신중하다고 합니다. 신중한 사람은 중용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유예는 산해경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이름입니다. '유(猶)’는 원숭이와 닮았는데 의심이 많아 땅에서 먹이를 찾다 바스락 소리만 나도 쏜살같이 나무 위로 도망칩니다. '예(豫)’는 몸집이 코끼리 만하지만 겁이 많아 얕은 냇물을 건널 때도 한참씩 망설입니다. 꼭 능력이 모자라서만이 아니라 기다림의 지혜도 담긴 말입니다.


산해경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 중 낭패와 교활도 있습니다. 낭패는 승냥이 낭(狼)과 이리 패(狽)입니다. ‘낭(狼)’은 뒷다리가 없거나 아주 짧은 대신 용감하지만 영악스럽지 못해 먹이 사냥이 서툽니다. ‘패(狽)’는 앞다리가 없거나 짧은 대신 꾀가 많지만 겁쟁이입니다. 지체 장애가 있는 이 동물은‘패(狽)’가 ‘낭(狼)’의 허리를 껴안고 한 몸처럼 붙어 다니면서 사냥을 합니다.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면서 상생하는‘낭(狼狽)’과 ‘패(狼狽)’가 자칫 따로 떨어지면 그야말로‘낭패(狼狽)’입니다. 일에 실패하거나 허둥지둥한다는 뜻입니다. 힘을 합쳐 소통하고 단결하지 않으면, 될 일도 안 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교활은 교(狡)와 활(猾) 두 상상의 동물을 합쳐서 구성된 단어입니다. 사전엔 각각 '교활할 교(狡)', '교활할 활(猾) '이라 써 있지만, '이리 교(狡)', 이리 활(猾)'입니다. 이 두 짐승은 사는 곳이 다르지만 함께 활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밀접한 관계입니다. 교(狡)라는 짐승은 옥산(玉山)에 살면서 모양은 개인데 온몸에 표범의 무늬가 있으며, 머리에는 소뿔을 달고 있다고 합니다. 이 놈이 나타나면 그 해에는 대풍(大豊)이 든다고 하는데, 이 녀석이 워낙 간사하여 나올 듯 말 듯 애만 태우다가 끝내 나타나지 않습니다. 활(猾)은 요광산(堯光山)의 동굴 깊숙히 살고 있습니다. 생김새는 사람과 같은데 몸은 돼지 털로 덮여 있어서 겨울 잠을 오래 잡니다. 만일에 활이 깨어나 도끼로 나무를 찍는 듯한 소리를 내며 울면 온 세상이 큰 혼란에 빠진다고 전합니다. 이처럼 교(狡)와 활(猾)은 간악하기로 유명한 동물입니다. 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나면 몸을 똘똘 뭉쳐 조그만 공처럼 변신하여 제 발로 호랑이 입속으로 뛰어듭니다. 그리고는 호랑이의 내장을 마구 파먹습니다. 호랑이가 그 아픔을 참지 못해 뒹굴다가 죽으면 뱃속에서 유유히 걸어나와 쓰윽 미소를 짓습니다. 여기에서 “교활(狡猾)한 미소”라는 관용구가 생겨났습니다.


남을 이용해 먹는 “교활”한 사람들. 주변에 많습니다.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법은 안 쓰는 겁니다. 그런 사람 밑으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가면 됩니다. 필요에 의해서 쓰게 되면, 꼭 끝에 가서 “교활”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 때에 가서 내가 아무리 호랑이인들 뭔 소용이 있습니까? 내가 이미 죽었는데. 지 죽을 지 모르고 교활한 사람을 필요하다고 쓰는 사람을 성인은 이렇게 부릅니다. “바보.”

2016년 7월 20일 독서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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