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일이란, 성과가 창출되는 노동만을 일컫습니다. 그 이외의 노동은 일이 아니지요. 회사에서 인간이란 재무재표상의 비용입니다. 여기까지는 경제학입니다. 경영학은 비용으로서의 노동을 줄이고자 합니다.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든지 노동의 질을 높이든지 합니다. 그 결과로 “내재화된 노동” 즉, 기계와 설비가 노동을 대체합니다. 물질적 풍요는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행복해지셨습니까?” 이런 질문 받으면 당혹스럽습니다. 루이비통 가방 가진 사람과 가지지 않은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할까요? 이런 질문하고는 다른 차원의 질문이니까요.
1만2천년 전, 농업혁명은 인류에게 행복을 안겨다 주었을까요?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때 학자들은 농업혁명이 인간성을 향한 위대한 도약이라고 생각했다.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 했다. 그러기는커녕, 평균적인 농부는 평균적인 수렵채집인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했으며 그 대가로 더 열악한 식사를 했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124, 129)
농업혁명으로 먹을 건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아이들 숫자가 늘어났습니다. 거둬 먹일 입이 늘어나니 삶은 더 고달픕니다. 또 착취 계급이 생겨났습니다. 군인, 사제 등 사회 엘리트층이 출현, 농민 몫을 빼앗아갔습니다. ‘일을 더 열심히 하면 삶이 더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계획은 그랬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500년 전 시작했고, 현재진행형인 과학혁명은 어떨까요? “과거의 모든 수고와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내가 좀 더 느긋한 삶을 살고 있는가?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인생이 돌아가는 속도를 과거보다 열 배 빠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 일상에는 불안과 걱정이 넘쳐난다.” (135)
모든 것에서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삶과 일의 균형을 찾고 싶겠지만, 실제의 일자리는 가정을 포기하고 일만 해야 하는 일자리 밖에는 없습니다. 가족을 먹여 살리자니 오히려 가정을 등한시해야 하는 삶이 지금의 삶입니다. ‘그래서 어쩌라구요’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일에 50%, 삶에 50% 이렇게 균등 배분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Work-Life Balance의 진짜 의미일까요?
2016년 7월 25일 독서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