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딱 두 종류가 있습니다. 정착하는 인간과 떠도는 인간. 이 두 인간은 다음 두 관점과 매치됩니다. 세계에 근본이 있다는 관점과 세계가 관계로 구성된다는 관점.
전통적 산업 사회까지 강조되었던 관점은 앞의 관점이었습니다. 조금 더 유식한 말로는 결정론적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톱니바퀴로 구성된 기계처럼 보는 관점입니다. 인간은 톱니바퀴에 비유됩니다. A라는 기능의 톱니바퀴가 B라는 기능의 톱니바퀴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잘 하는 것을 잘 하는 전문가적 지식이 강조됩니다. 구성원은 전체를 보는 시각을 가질 필요도 없으며 가져서는 안된다는 이데올로기가 탄생합니다. 전체를 조망하고 관계를 볼 줄 아는 사람은 자본가와 권력자들이 됩니다. 그들만의 세상입니다.
지금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세계를 지키기 위한 비밀이야 극소수만이 여전히 알고 있겠지만, 세계가 어디로 향하는지 방향성을 결정하는 지식은 거의 대부분 민주화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모래알 같은 사람들의 지식과 의견이 Big Data로 잡히고 있습니다. Big Data를 통해서 개인 조차도 누구나 세상을 전체로서 조망할 수 있는 단계로 들어섰습니다.
효율이 비즈니스를 가속하는 단계에서 효과가 비즈니스를 가속하는 단계로 진화합니다. 앞으로의 비즈니스는 Data의 Source로서 연결된 개인의 네트워크에서 발견됩니다. 여전히 근본에 머물러 있다면, 굶어 죽기 딱 알맞은 세상입니다. 지금은 근본이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나를 규정하는 시대입니다.
어떤 삶을 살지는 스스로 결정합니다. 남도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 갑니다.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니면서 옳네 그르네 하지 말아야 합니다. 타인의 삶이 나의 삶에 해를 끼치거나 나의 삶이 타인의 삶에 해를 끼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화입니다. 나의 선택이 남에게 해를 끼칠 때 무엇이 정의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정의가 항상 옳다고 주장하지 못합니다. 정의는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정의가 오늘날에도 정의인 것은 아닙니다.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이 우주적 사건과 같은 행운입니다. 남편과 아내조차도 화성인과 금성인의 관계인 걸 감안한다면 말입니다. 섹스만 할 거면 그리고 애만 낳아 기를 거면, 그 결혼을 왜 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함께 사는 사람과도 이 정도라면, 가끔 만나는 사람과는 어떻겠습니까?
교양의 정의는 “타인과 소통하고 스스로를 성찰하며 그 결과를 행동으로 이끌어내는 능력”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교양을 너무나 얕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생물학도 뇌과학도 천체물리학도 심지어 Big Data 공학도 지금 시대에서는 교양입니다. 이런 것들을 모르고 어떻게 그것이 보편화된 세대를 살아갈 자식들과 교양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자식들이 스스로 알아서 적응하여 살아가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의 전부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성원들이 스스로 알아서 적응하여 혁신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리더가 할 일의 전부입니다.
부의 미래가 바뀐 100세 시대의 재앙은 부모와 자식이 같이 나이 먹으면서 각자 도생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최소한 부모와 리더가 꼰대만 되지 않는다면, 불확실성의 시대에 제 역할을 잘 하고 는 것입니다. 오래 사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내가 일찍 죽어야 하는데, 너무 오래 살았어.”라는 말을 왜 했는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삶 그 자체가 재앙으로 변할 때 우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시대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2017년 3월 20일 독서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