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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논리성과 비합리성이 창의성의 원동력

by 송창록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에는 수만 가지의 답이 가능하겠습니다. 반면 “왜 태어났는가?”란 질문이나 “나의 본질은 무엇인가?”란 질문에는 알고 있는 수만 가지 지식들이 별로 소용이 없습니다. 지식은 과거를 반영하고 있고, 우리가 발휘해야 할 지혜는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과거의 정보를 통하여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을 “결정론적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뉴턴이 발견한 미적분학의 철학적 의미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통해 모르는 것도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유낙하 물체의 다음 1초 후 위치는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모든 세상이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아니, 믿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만납니다.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라 “정확”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쓸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관찰자의 개입을 통해서 고양이의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면 이러한 세계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많은 과학적 발견 등을 통해 혁신적인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 기술들은 질 좋은 관찰을 가능하게 하고 많은 데이터를 만들어냅니다. 방대한 데이터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인간은 이 데이터를 처리할 “지능”을 만듭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Data의 한도에서 동작하는 외부 “지능”입니다.


다시 질문. “외부 ‘지능’이 있다고 해서 인간은 이전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실상은 그렇다고 말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환경의 복잡성이 증가한 만큼만 진화한 것이지, 이전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근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VUCA 시대에는 근본 질문이 오히려 더 부각됩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더 많이 복잡해진 세상을 사는 것은 아닌지.


인간이 만든 모든 도구는 인간이 가진 육체의 확장입니다. 모든 도구는 인간의 몸의 확장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도 인간의 몸의 확장입니다. 가공할 수준의 몸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본질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더 많이 안다고 믿는 것이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는 무지한 것보다 더 치명적일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인류의 진화 과정을 보면 감성이 먼저 발생하고 이성이 그 뒤에 발생합니다. 감성은 수백만 년 전에 발생하였지만, 이성은 불과 몇 천년 전에 발생하였습니다. 인공지능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성을 대체합니다. 감성은 아직도 잘 파악되지 않는 인간 뇌의 작용입니다. 감성은 이성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지극히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비논리성과 비합리성이 바로 Creativity의 원동력이 됩니다.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감성적 또라이들은 Alien입니다.

2017년 6월 26일 독서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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