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판타지

by 송창록

선택한 것과 포기한 것 중 어느 것이 더 애착이 갈까요? 놀랍게도 대부분이 포기한 것에 더 애착이 갑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지금 자신이 가고 있는 길과 전에 자신이 포기했던 길.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전에 자신이 포기했던 길에 미련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길로 갔더라면 지금처럼 살지 않았을 거라는 환상이 있습니다.


남자들의 환상 중 첫사랑 판타지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윤색되고 덧칠이 되어 첫사랑의 표준 이미지까지 창조하기에 이릅니다. 하얀 피부, 원피스 그리고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 판타지는 시간이 멈춰 있습니다. 판타지는 판타지로 있어야지 현실로 나타나면 안됩니다. 남자가 판타지에서 벗어나려면, 첫사랑을 만나야 합니다. 피터팬에서 벗어나 비로소 어른이 됩니다.


뇌과학에 따르면, 인간은 선택이라는 두뇌활동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씁니다. 결정장애는 선택이라는 상황에 피로함을 느끼는 인류의 자기방어기제입니다. 잘 살고 싶으면, 그런 선택은 다른 사람에서 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남을 위해 선택을 대신 해주는 직업이 큐레이터입니다. 요즘 시대에 큐레이션은 무조건 혁신이고 스타트업입니다. 어지간한 온라인쇼핑몰은 소비자의 구매 취향을 분석해서 큐레이션 서비스를 제공해줍니다.


“슬라이딩 도어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패러디하여 이휘재의 인생극장 “그래 결심했어”가 떴습니다. 마치 평행우주론처럼 매 순간 우리의 선택으로 인해 두 개의 인생으로 나뉩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해피엔딩은 없습니다. 그 선택이 해피엔딩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착각할 뿐입니다. 아직 최고의 순간은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라마 “연애시대”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참 센티멘탈합니다. 은은한 백열조명이 내려앉은 나무 탁자에서 막걸리 앞에 놓고서 라디오에서 누군가가 읽어주는 것을 듣고 있다면, 그날은 술이 좀 늘 거라는.

“가끔은 시간이 흐른다는 게 위안이 된다. 누군가의 상처가 쉬이 아물기를 바라면서. 또 가끔 우리는 행복이라는 희귀한 순간을 보내며 멈추지 않는 시간을 아쉬워 하기도 한다. 어떤 시간은 사람을 바꿔 놓는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랑은 시간과 함께 끝나고 어떤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드러나지 않는다. 언젠가 변해버릴 사랑이라 해도 우리는 또 사랑을 한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시간의 덧없음을 견디게 하는 것은 지난 날의 기억들.


지금 이 시간도 지나고 나면 기억이 된다. 산다는 것은 기억을 만들어 가는 것. 우리는 늘 행복한 기억을 원하지만 시간은 그 바램을 무시하기도 한다. 인생은 고요한 물과도 같이 지루하지만 작은 파문이라도 일라치면 일상을 그리워하며 그 변화에 허덕인다. 행복과 불행은 시간 속에 매복해 있다가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달려든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약하여서 어느 날 문득 장난감처럼 망가지기도 한다. 언젠가는 변하고 언젠가는 끝날지라도 그리하여 돌아보면 허무하다고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이 시간을 진심으로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슬퍼하고 기뻐하고 애닳아하면서. 무엇보다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고통으로 채워진 시간도 지나고 죄책감 없이는 돌아볼 수 없는 시간도 지나고 희귀한 행복의 시간도 지나고 기억되지 않은 수많은 시간을 지나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가끔 싸우기도 하고 가끔은 격렬한 미움을 느끼기도 하고 또 가끔은 지루해 하기도 하고 자주 상대를 불쌍히 여기며 살아간다. 시간이 또 지나 돌아보면 이때의 나는 나른한 졸음에 겨운 듯 염치 없이 행복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가 내 시간의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우리를 해피엔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2017년 6월 8일 사람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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