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농업을 배우면서 하나의 이치를 알게 됩니다. 현재 우리가 키우는 작물과 가축은 본래부터 자연에 존재했던 그 모습대로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모두 이종 교배와 같은 과정을 거쳐 탄생한 잡종이라고. 심지어 일부 작물은 씨를 심어도 발생하지 않거나 교배를 하여도 생식이 되지 않는다고.
하나의 이치를 더 알게 됩니다. 단일 종으로 너무 오래 존재하면 환경과 해충에 취약해져서 수확량이 점점 감소한다고. 작물과 가축은 끊임없이 잡종을 개발해야만 한다고. 잡종일수록 병충해에 강해지는 현상을 농업 용어로 ‘잡종강세’라고 한다고.
중학교 때 세계사와 농업을 같이 배웠습니다. 인류의 문명사를 농업 과정에 비유하면서 공부하는 재미를 톡톡하게 누립니다. 세계의 문명사를 농업의 ‘잡종강세’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정말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그리하여 대학에서 ‘인류사는 자연사의 연속’이라는 자연과학철학을 정말 편하게 이해합니다.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제국’을 다룹니다. 제국은 다른 문화를 정복하여 다양성을 말살시키는 것만 하지 않습니다. 다른 문화를 지배 체제 내에 포섭하여 ‘Melting Pot’을 만듭니다. 제국은 다양성을 강제력으로 Mix-and-Match함으로써 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 광범위한 잡종 문화 양식을 전파합니다. 제국의 생멸 과정을 통해 문화와 문명이 함께 진화합니다. 현재를 사는 인간 중에 ‘제국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한 명도 없다고 말합니다. 제국을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로 보지 않고, 제국이 인류사에 남긴 흔적이 매우 깊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현재 인류가 누리는 문명의 출처를 따지면, ‘제국의 후유증’이기도 하고 ‘제국에 저항한 성과’이기도 합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다양성이 모여 ‘Melting Pot’을 형성하는 것이 자연사와 인류사의 방향입니다. 인류는 끊임 없이 이동하여 서로 섞입니다. 정착한 후에는 정복을 통해 서로 섞입니다. 지금은 제국에 의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섞이는 시대입니다. 나 홀로 독야청청하며 자기 고집만 지키면, 나이에 관계 없이 즉시 ‘꼰대’가 됩니다. 내 안의 제국주의도 재앙이지만, 내 안의 독립도 재앙입니다.
다양성을 따르는 두뇌활동은 ‘다르게 보기’입니다. 인간의 두뇌활동은 ‘언어’에 기반한 활동이므로,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은 ‘다른 두뇌활동’과 같습니다. ‘다른’ 언어 체계에서 ‘다른’ 단어와 ‘다른’ 문장을 이해하면서 ‘다르게’ 생각하게 됩니다. ‘잡종강세’처럼 ‘잡종언어’가 인류를 ‘병충해’와 같은 ‘몰이해’의 위협으로부터 살아남는 힘이 됩니다.
세계사를 다른 관점에서 공부하면, 통일신라시대는 세계사 기준으로 해양무역시대였고, 지금의 경주인 서라벌이 세계 3대 무역항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처용가에 나오는 역신이 사실은 아라비아 무역상입니다. 통일신라시대에 벼슬에 오른 상당한 사람들은 배를 타고 들어온 서역 사람입니다. 한민족이 단일 혈통으로 이어온 단일 민족이라는 것은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는 허구입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민족도 자연사의 관점에서는 단 한번도 단일 민족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국가라는 탈을 뒤집어쓴 민족 그 자체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던 허구입니다.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원한과 분노의 개념입니다.
제국의 해체 후에는 다양성과 민주정이 남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2017년 8월 14일 독서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