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를 바라보는 관점

by 송창록

자기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누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자기 자신’, 즉 Self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Self를 보는 관점은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본질”로 보는 경우와 “관계”로 보는 경우입니다.


본질로 보는 경우는 자기 안에 불변하는 근본적인 Self가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세상은 이 근본적인 Self가 꾸는 꿈과 같습니다. 그래서 현상에 끄달리지 말고 Self를 찾으라고 합니다. 선, 단, 명상센터 등은 모두 이렇게 표면적인 Self를 내려놓고 자기 안의 진짜 Self를 찾는 여행입니다. 자기 안으로 들어가려면, 현상을 쉬게 해야 하므로 멈추어야 합니다.


관계로 보는 경우는 자기 안에 불변하는 근본적인 Self가 없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Self는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관계, 인연, 인과에 의해 형성됩니다. 그래서 Self를 찾지 말고 관계, 인연, 인과에 따라 오는 삶에 대해 행위를 잘 남기라고 합니다. 선한 행위는 선한 관계와 인연을 낳고, 악한 행위는 악한 관계와 인연을 낳습니다. Self는 Being이 아니라 Doing에 의해 결정됩니다.


대부분의 철학과 종교는 본질과 관계를 양극단으로 하여 제각각 비율로 섞은 것입니다. Self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으로 시작한 불교가 Self가 있다는 “참나”를 찾는 종교로 변하기도 합니다. Self를 버리라는 가르침으로 시작한 기독교가 “부활”을 통해 Self를 꿈꾸는 종교로 변하기도 합니다. 모든 종교는 이 Self를 다루는 것이기에 사실 동일한 오마주입니다. Self의 지향점으로 공경의 대상만이 다를 뿐.


인식론에 따르면, 세상을 인식하는 Self와 그 인식하는 Self를 인식하는 Self가 다릅니다. 그래서 말로 이렇게 표현됩니다. “나는 세상을 인식하고 있는 나를 인식하고 있다.” 앞의 나와 뒤의 나가 다릅니다. 인식하고 있는 나를 인식하는 나가 보다 선험적입니다.


이런 인식하는 나를 분할하여 인간 의식의 심층구조를 해석한 사람이 프로이드와 융입니다. 이드, 에고 그리고 수퍼에고, 또는 표면의식, 무의식 그리고 잠재의식. 의식을 물질인 뇌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과학이라면, 의식을 정신의 비물질적인 결과로 보는 것이 종교입니다. 과학에서 의식은 뇌의 Output이지만, 종교에서 의식은 정신의 Output입니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오버랩되지 않습니다. 과학은 정신의 관계성을 다루지만, 종교는 정신의 초월성을 다룹니다.


이제 근본적인 질문을 합니다. 내 안의 Self는 찾아질까요? 불행하게도 찾아지지 않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생각하는 나, 이 자체가 “Self”입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초기 가르침처럼 내 안에 따로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따로 내 안에 존재한다고 믿는 “Self”는 본래 없는 것을 만들어서 믿는 것이므로 “허상”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가 아닌 “나”는 모두 허상입니다. 그래서 “나”를 내려놓으라고 자꾸 강조합니다. “방하착”


내 안에 주인공이 있다는 말과 주인이 되라는 말은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내 안의 주인공은 Being이기 때문에 허상이고, 주인은 관계에 따른 Doing이기 때문에 실상입니다.


隨處作主 立處皆眞 수처작주 입처개진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니라.


이 말의 뜻을 아시겠지요. ‘나’는 찾을 대상이 아닙니다. ‘나’를 찾으라고 하는 책들은 읽지 않아도 됩니다.

2017년 12월 20일 독서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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