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은 중학생 때 처음 읽었고, ‘싯다르타’는 고등학생 때 처음 읽었습니다. 물론 대학생이 되어서 두 책을 여러 번 더 읽었습니다. 글이란 공개되는 순간 작가의 것이 아닙니다. 설령 거기에 작가의 사고와 가치가 들어있다 하더라도. 글은 공개되는 순간 독자의 것이 됩니다. 독자는 글을 자신의 관점으로 재해석합니다. 평론은 작가의 관념과 의도를 읽어내는 것이지만, 독서는 자신의 관점을 글에 투영하는 과정입니다. 같은 책이더라도 읽은 느낌은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때마다 모두 다릅니다. 글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읽고 있는 내가 변합니다. 물리학의 관점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시간은 공간과 함께 ‘존재’합니다. 물리학은 시간의 방향성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좌표축의 어느 한 점으로 존재합니다. 시간이나 공간은 모두 상대적입니다.
강과 강물은 다릅니다. 강은 그대로 인데, 강물은 어제의 강물이 아닙니다. 강물은 매일 새로워지는데 어찌하여 강은 매일 새로워지지 않을까요. 공간이라는 관점에서 강은 원천부터 바다에 이르는 목적지까지 강물의 흐름과 무관하게 존재합니다. 마찬가지의 비유로,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나라는 육신의 생노병사와 무관하게 존재합니다. 그런 나가 강과 마찬가지로 존재합니다. 여기서 역설이 탄생합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사실상 불멸이며, 모든 불멸이라 믿은 것들은 다 사라진다는 것. 실상은 사실상 허상이며, 허상이 사실은 실상이라는 것.
과학은 종교적 관점에서는 허상인데 과학적 관점에서는 실상인 물질을 다루고, 종교는 과학적 관점에서는 허상인데 종교적 관점에서는 실상인 영혼을 다룹니다. 이 둘은 평행선이며, 서로 만날 수 없습니다.
인류는, 과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종교적 관점으로 근사하며, 종교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과학적 관점으로 근사합니다. 상대는 과학의 세계이고 절대는 종교의 세계입니다. 과도한 종교로의 편향을 극복해온 과정이 과학의 역사이고, 과학의 불가해성을 믿음과 규율로서 극복해온 과정이 종교의 역사입니다. 둘의 통합은 종교가 도달하려는 목적과 과학이 도달하려는 목적이 같아지는 순간입니다.
인류의 과학기술은 이제 종교가 되려 합니다. 구글신과 아마존신은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훤히 알고 있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인류는 태어남은 있어도 죽음은 없는 단계에 이릅니다. 그 날부터 과학은 종교와 합일합니다. 몸이 죽지 않는다면, 영혼은 물질인 몸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2018년 3월 5일 독서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