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미국 명문 예일대와 하버드 대학원 출신으로 한국에서 출가한 미국인 현각 스님이 2016년에 “기복신앙이 된 한국 불교와 연을 끊겠다”고 말해 파문이 일었습니다. 이에 대한 불교계의 반응은 굉장히 격했습니다. 메신저가 메시지를 전달했으면 메시지를 봐야 할 일이거늘 메신저를 공격하는 저열함을 보입니다. 달을 가리켰으면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보고 있는 격입니다.
에피소드 2.
축구경기에서 골을 넣은 선수가 감사의 기도를 하는 세러모니를 종종 봅니다. 자신이 의지하고 믿는 그 분께 감사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상대편에도 같은 분을 의지하고 믿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 상대편 선수가 이번에 골을 넣습니다. 그 선수도 감사의 기도를 하는 세러모니를 합니다. 두 경우 모두 같은 분이 내린 은총입니다. 그런데 같은 분을 의지하고 믿는 상대편의 선수가 골을 넣은 순간에는 왜 감사의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 편이 골을 먹어도 그 분의 은총이라면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골을 넣든 골을 먹든 삶의 모든 순간이 그 분의 은총인데 말입니다. 두 선수가 의지하고 믿는 그 분이 서로 다른 분인가 봅니다.
에피소드 3.
연말이면 항상 수학능력시험이 있습니다. 절에는 '수능대비 100일 기도' 플랭카드가 붙고, 교회에는 '수능대비 100일 새벽기도' 플랭카드가 붙습니다. 소위 기도빨이 잘 받는다고 소문난 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점집이나 무당집도 북새통을 이룹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학이란 곳이 정원이 있기 때문에 절대점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위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자기 자식이 잘 되길 바라며 하는 기도는 누군가가 뒤로 밀려나길 바라는 기도입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이 사람을 차별하는 분들입니까? 그 기도를 들어주면 부처님과 예수님은 뭐가 됩니까? 인간과 똑같아지는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인간이 빌면 소원을 들어주는 그런 부처님과 예수님은 없습니다.
종교란 한자어를 풀이하면 마루 종 가르칠 교입니다. 마루는 고갯마루 할 때 그 마루입니다. 꼭대기란 뜻이지요. 꼭대기가 무엇입니까? 꼭대기에 가야만 세상을 한 눈에 다 알 수가 있으니, 바로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한 눈에 알아보는 깨달음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서양에서는 종교를 Religion이라고 합니다. 이 Religion은 깨달음하고는 일절 관계가 없습니다. Religion이라는 단어의 뜻은 "신과의 합일"입니다. 즉, 신의 종인 제사장이 신과 합일하여 "Oracle" 즉, 신탁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빙의, 무당, 박수입니다. 힌두교는 "범아일여"를 목적으로 하는데, 역시 신과 하나됨을 추구하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라 Religion입니다.
불교는 Religion이 아니라 종교입니다. 깨달으신 분이 부처님이고, 깨달음을 글로 남긴 것이 경전이고, 깨달음을 배우는 분이 수행자로서 스님이고, 깨달음을 배우는 곳이 절입니다. 신을 모시고 신에게 소원을 빌고 기도하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신도 깨닫지 못하였기에 중생이라고 보는 것이 불교입니다.
어느 절에 갔더니 스님이 00신 기도를 하라고 하면, ‘저 스님 귀신 들렸구나’하고 알아채면 됩니다. 행색만 스님이지 실제로는 신의 제사장입니다. 영탑이나 위패처럼 무언가를 만들어 놓고 비는 것도 귀신을 모시는 행위입니다. 청정한 스님은 부처님법을 배우고 익혀서 부처님처럼 되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행위의 결과로 타의 모범이 되면 스승으로 불리어집니다.
부처님과 예수님은 인간의 스승입니다. 그 분들처럼 살면 그 분들처럼 될 수 있다는 길잡이입니다. ‘극락’과 ‘천국’은 죽는 순간까지 부처님과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고자 행한 행위를 한 사람에게만 열려 있습니다. 믿고 안 믿고가 아니라 행하냐 행하지 않냐가 결정합니다. 종교에 관계없이 인간은 자기가 지은대로 자기가 받고 삽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기본 교리입니다.
절에 가고 교회를 가는 이유는 영혼이 가야 할 바른 길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절과 교회의 선택 기준은 스승이 될 만한 타의 모범이 될 만한 수행자가 거기 머물고 있느냐가 되어야 합니다. 옛날 스님은 청정한 선지식이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언제든지 살던 절을 버리고 짐을 싸서 선지식을 만나러 떠났습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은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것이지 진리 바깥의 모든 것을 구속으로 여깁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입장에서는 종교인도 속인도 모두 수행자일 뿐입니다.
문제는 어느 분이 청정한 스승인지 어떻게 알 수 있냐 입니다. 무학대사는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자신이 청정하고자 하는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청정한 스승은 발견됩니다. 그때, 떠날 수 있는 사람만이 남들이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청정한 스승은 따로 있습니다. 청정한 제자만이 청정한 스승을 발견합니다. 제자가 스승을 찾아 떠나는 길이 깨달음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2018년 3월 27일 독서통신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69/0000155722?sid=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