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잘 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막상 말을 들어보고 행동을 관찰하고 주변 관계를 파악하면 자기가 말한 자신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이런 불일치가 있는 걸까요.
심리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과거만을 기억하여 인식을 재구성하며 끊임없이 기억을 조작합니다. Data는 문제가 없지만, Data의 분석에 오류가 있습니다. 인간은 Data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리더십에는 360도 View라는 게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는데 맹점이 있기 때문에 상하좌우 Peer들이 보이는 대로 관찰하여 기록합니다. 자기가 보고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이 남에게 보여지지 않습니다. 남도 그 사람 앞에서는 보이는 대로 얘기하지도 않습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더라는 것 또한 객관화하지 않으면 역시 오류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관한 한 눈뜬 장님입니다.
남에게 자기 자신이 어떻게 보이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자기 자신이 무엇이냐를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외로움은 타자화된 자아이고, 고독은 자아화된 자아입니다. 외로움은 나를 잃어버린 상태이고, 고독은 나를 직면하는 상태입니다. 죽음의 순간에는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직면합니다. 죽음은 절대 고독의 순간입니다.
아주 옛날에 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 연작시가 있었습니다. ‘홀로서기3’의 첫 연은 여기저기서 인용되었습니다.
보고싶은 마음을
오래 참으면
별이 된다고
작은 창으로 바라보는 하늘이 유난히 맑다
늘상 시행착오 속에 살면서
나를 있게 해준 신이
나에게 원하는 게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숱한 밤을 밝혀도
아직도 나는
나의 얼굴을 모르고 있다.
인간은 자기 얼굴 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인데, 남보다 공부를 많이 하고 경험을 더 했다고 해서 남보다 더 잘 할 수 있다고 믿고 행동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다만 서로 다를 뿐인데 말입니다. 도대체 ‘뭣이 중헌디’ 스스로 알기나 할까요?
2018년 10월 11일 독서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