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릇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이걸 도덕 강박성을 가진 사람은 ‘잘 알지도 못하면 말하지 말라’로 자주 인용하여 사용합니다. 진짜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용하는 경우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합니다. 이거 바르게 수정해 주려면 말을 참 많이 해야 합니다.
사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해당 문장은 동어반복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핵심은 ‘명료’에 있습니다. ‘명료’는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논리 즉 함수 관계가 성립하냐 성립하지 않냐의 문제입니다. 언어는 논리적 함수 체계를 갖고 있기에 함수 관계가 없는 대상을 표현하는 말은 쓸모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로고스’입니다. 언어는 로고스의 외형입니다.
침묵은 왜 할까요? 몰라서 침묵할까요? 아니면 알고 있기 때문에 침묵할까요? 모르면, 질문도 못합니다. 그런 경우는 침묵이라고 하지 않고 무지(아는게 없음)라고 합니다. 청마 유치환은 ‘깃발’을 보고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언어는 소리가 아닙니다. 언어의 본질은 명료, 즉 의미의 명료한 표현과 전달입니다. 그런 의미로 침묵은 언어의 선행이 아니라 언어의 후행입니다. 침묵은 소리 없는 아우성입니다.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의미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침묵을 선택한 겁니다. 말하지 않음도 언어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통해 세 가지를 표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의미 있음, 의미 없음, 의미를 다룰 수 없음. 의미 있음은 참과 거짓을 다룰 수 있음을. 의미 없음은 참과 거짓이 모순되어 있음을. 의미를 다룰 수 없음은 의미를 담은 실체가 없음을.
사랑은 물리적 실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한다고 합니다. 복은 물리적 실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해가 오면 모두 복 많이 받으라고 말합니다. 자연은 소리가 있지만 언어는 없습니다. 자연은 언어는 없지만 의미는 있습니다. 과학은 그것을 법칙이라고 하고 종교는 그것을 이치라고 합니다. 이치를 신격화하고 절대화하여 믿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종교입니다.
때에 따라 말을 하고 때에 따라 침묵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는 일입니다.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침묵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걸 읽어낼 줄 모르면 인간이 덜 된 겁니다.
와이프와 함께 외출하고 돌아왔는데, 와이프가 말도 안하고 화가 나있습니다. 이거 못 달래면 사망인데, 남편은 아래와 같은 무한루프에 걸립니다. 비극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침묵도 답이 아닙니다, 이 경우는.
2018년 12월 24일 독서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