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구성원의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회사를 왜 다니는지도 모르는 구성원이 회사에서 어떻게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행복하려면 ‘우리’를 전제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행복은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모두가 행복하려면 누구나 희생도 내놓아야 합니다. 내가 행복하면 누군가의 행복이 무너집니다. 희생을 내놓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라면 밸런스가 깨집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사람은 이익에는 작게 반응하고 손해에는 크게 반응합니다. 남이 얻은 행복은 크고 내가 얻은 행복은 작습니다. 남이 내놓은 희생은 작고 내가 내놓은 희생은 큽니다. 손익의 심리 저울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작은 희생으로 큰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소수의 목숨을 내건 희생이 없다면, 다수의 행복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소수는 아무나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주대 응급외상센터 이국종 교수의 책 ‘골든타임’은 가슴을 쓸며 눈에 핏발이 설만큼 눈물을 참으면서 읽습니다. 막장에 들어가서 희망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이 자기가 내놓은 희생의 크기를 논하기에는 부끄럽습니다. 소수가 행복이 전혀 없는 막장에 들어가야만 다수의 소소한 행복이 얻어지는 메커니즘이 사회가 유지되는 메카니즘입니다. 정작 구성원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어떻게 모두가 행복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희생을 나눌 것인가 인데 말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러한 희생과 행복의 거래관계를 통해서 다수의 행복이 오래가고 지속가능하도록 유지될 수 있을까 입니다.
사회가 지속가능하지 않은데 그 사회에 속한 기업이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요. 기업이 지속가능하지 않은데 그 기업에 속한 구성원이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요. 바로 옆 이웃의 삶이 지속가능하지 않은데 이웃과 사회 인프라를 공유하는 나 자신의 삶이 지속가능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일을 임금으로 교환하는 삶. 일이 놀이가 아니라 노동인 삶. 일과 여가의 관계를 일과 삶으로 분리하여 인식하는 삶. 이를 간파한 마케팅은 ‘소소하고 확실한 행복(소확행)’이라는 언어를 창조합니다. ‘일은 고통이며 소확행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속삭입니다. 우리는 그나마 있는 조그마한 부도 그렇게 털립니다.
일에는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일하는 사람이 모르고 있을 때, 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말합니다. 대량생산체제에서는 가치와 의미를 아는 노동자가 필요없습니다. 요구되는 노동자는 기계적 일을 반복하는 노동자였기 때문입니다.
일에서 가치와 의미를 찾으려면 일 자체가 탐구 영역이어야 합니다. 기계적 일을 반복하는 노동자에서 의미를 창조하거나 가치를 높이는 일을 하는 노동자로 전환하는 것. 반복적인 일을 기계와 소프트웨어에 넘겨주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해야 일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일터에서 발생한 행복한 감정을 가정으로 가지고 가야 사회적 개체의 기본 단위로서 가족도 행복합니다. 가정은 의미를 나누고 용기를 나누고 응원을 받는 공간입니다. 일터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공간이 되면 안됩니다.
일을 통해 사람들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일을 가진 가장 큰 행복입니다.
2019년 4월 5일 사람통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