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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적극적 동조

by 송창록

시람의 본성에 관한 네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1. 사람은 본래 착하다.

2. 사람은 본래 악하다.

3. 사람은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4. 사람은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증명되지 않는 가설입니다. 어느 가설을 본인이 믿느냐에 따라 행위가 달라집니다. 처음 믿음이 배신당하면 다른 가설로 변절합니다. 처음 믿음을 변절한 사람은 변절의 불가피성을 증명하려고 더 강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정치세계는 변절 후 얻은 믿음이 보여주는 막장의 끝판왕입니다. 그렇게 논리적이던 사람이 변절 후에는 그렇게 비논리적일 수가 없습니다.


공정한 세상 가설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보상을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벌을 받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가설입니다. 시민국가 미국을 건설한 프로테스탄트와 같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에 그 결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노력이나 일이나 자기가 들인 만큼 언젠가는 보상받는다고 믿습니다.


공정한 세상 가설은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상위 1%와 차상위 9%가 나머지 90%를 향해 하는 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출발선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90%가 90%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노력 부족’ 그리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상위 1%와 차상위 9%의 2세/3세는 자신의 성공을 ‘노력’해서 그리고 ‘열심히 일해서’라고 합니다. 기회는 결코 공정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나아지지 않는 것은 개인 노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은 불공정하고 불공평하고 불균형합니다. 이것을 보다 공정하고 보다 공평하고 보다 균형있게 만드는 방법은 따로 있습니다. ‘1원 1표’인 세상에서 ‘1인 1표’가 그 방법입니다. 다수의 선택이 세상을 바꾸는 힘입니다.


다수의 선택은 역으로 세상을 파괴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독재는 느닷없이 탄생하는게 아니라 민주정이 자발적으로 선택합니다. 스타워즈에서 은하 공화국 위원회가 자발적으로 투표를 통해 은하 제국을 선택하듯이. 다수의 선택이 불공정/불공평/불균형이라면, 세상은 역행하고 국민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영화 ‘다운폴’에서 괴벨스가 한 명대사입니다.


“저는 그들을 조금도 동정하지 않습니다. 동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직접 선택한 운명이니까요. 받아들이기 싫어도 그건 사실입니다. 누가 강요하지도 않은 그들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고 적극적 동조입니다.

2020년 4월 7일 독서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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