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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May 20. 2021

미루기의 낭만에 대하여


 미루는 일에는 어떤 낭만이 있다. 휴일이든 평일이든 관계 없는 정확한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 군더더기 없는 신속한 업무 처리, 외출 후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화장을 지우고 방 청소하기 등등. 현대 사회에서 성공한 인간이 되려면 갖춰야 할 덕목이건만, 나는 우리가 무엇을 찾고 있든, 정해진 시간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만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효율성이 자리를 차지하면 낭만은 자취를 감춘다.




 낭만이 밥 먹여주는 것은 아니다. 태도는 사실보다 중요하다는 말도 맞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믿는다. 무용한 하루가 다음날 걸을 수도, 달릴 수 있는 힘을 준다고. 나는 단지, 내가 만들어가는 하루의 여유로움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정하는 적절한 일의 시기를 기다리는 일에 죄책감을 가지고 싶지 않을 뿐이다. 코 앞의 목적지를 두고 빙 돌아가는 선택도 존중하는 사회가, 우리가 마음의 소리를 따라 길을 찾을 시간을 용인해줄 것이다.




 대학교 때 졸업하려면 의무적으로 수강해야 했던 채플 시간에서 들은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떤 초대 강사가 왔었는데, 인생은 버티는 거라고 했다. 너무 인상깊어서 친구에게 이 말을 전했더니,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앞으로 가고 있는데, 그냥 버티기만 하는 건 끔찍하다고 내게 말했다. 요즘 세상에 뒤로 가는 것도 아니고, 잠시 멈춤으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지. 뒤처진다는 것은 스스로 위태로워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쉬지 않고 걷는 행위, 걷기보다 뛰라는 암묵적인 재촉, 지도를 펼칠 틈도 없이 내려버리는 선택이 더 큰 위기를 맞닦뜨리게 만든다.




 햇볕이 더이상의 수면을 허용하지 못할만큼 푹 자다가, 일어난 후에도 얼마간 침대 위에서 뒤척거리며 여유를 즐기는 일, 지금 할 수 있는 일임에도 오로지 내 마음이 덜 준비가 되었다면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무한정 미뤄두는 일, 심지어는, 당장 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 영혼이 숨을 돌리고 기지개를 펼 수 있도록 게으름 피우는 것. 혹은, 미루는 내 자신을 너무나 미워하면서도 심지어 영영 아무것도 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면서도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할 꿈을 가슴에 품고 그 언젠가를 기다리는 것. 이것은 겉보기에는 어리석은 미루기이지만,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나 손 안에서 조금씩 눈덩이를 굴려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한, 일상의 행복을 느끼게 만들어주는 작은 숨구멍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출발신호가 울려도 신발끈을 제대로 묶고, 충분히 목을 축일 때까지, 옆에 선 친구에게도 인사를 하고, 나를 지켜보는 나의 가족들에게도 손을 흔들어주고, 무엇보다 내 마음이 준비 될 떄까지, 다시 말하자면 내가 뛰고 싶을 때까지 마음껏 미루다가 비로소 출발할 필요가 있다. 충분히 미루고 또 미루다가 나만의 시간표에 맞게 움직일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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