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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May 19. 2021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

요즘 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 - 9. 전시회

초상화는 '나'와 '나를 보는 사람들'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레이슨 페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체성이란 혼자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
스스로 만들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아의 본질"이라고요.

전시를 통해서 '나를 보여주는 오래된 전통'을
새롭게 발견하는 즐거움을 찾으셨다면 좋겠습니다.

― <시대의 얼굴>,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회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전시회는 종종 간다. 어쩌면 그림이 아니라 전시관에 들어서서 거니는 그 행위, 느낌, 작품과 작품 사이의 소요를 위하여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활자 중독이라 그림보다 그림에 대한 설명을 더 오랜 시간 보는지도. 그러나, 이따금씩 좋은 전시회가 있다고 하면 꼭 가서 보게 된다. 그림을 감상하는 일에는 일상에 젖은 내 마음을 환기하는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내 영혼이 필요로 하는 무언가가.





 오늘은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을 보러 다녀왔다. 보통 전시회는 개관 시간에 맞춰서 간다. 요즘은 코로나19라 시간마다 최대 인원이 일정하게 정해져있기는 하지만, 가장 덜 붐벼서 그나마 여유롭게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데 10시 전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날도 시간도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이 긴 것은, 사람이 많기 보다는 발열체크 등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한 일련의 과정 때문이었는데, 11시 20분쯤 박물관을 나설 때 보니 줄이 거의 없었다. 




 

 이 전시회에 특별히 끌렸던 것은 바로 초상화라는 장르 때문이었다. 이런 기획의 전시는 처음 가보는 것 같은데, 그것도 세계 역사와 문화를 빛낸 76인의 초상화를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정체성과 자화상’라는 다섯 주제로 엮어서 구성하였다. 올해 초만 해도 이제는 이렇게 안이하게 살면 안되겠다고 결심했으나, 벌써 한 해의 반이 다 가게 되었는데도 일상의 쳇바퀴를 돌리느라 내가 세웠던 목표도 꿈도 흐릿해져가는 지금 보면 마음을 굳게 다지는데 썩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이를 가진 학부모님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인물과 초상화에 대해서 조곤조곤 설명해주시는 분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예매할 때는 몰랐는데, 그러고보니 교육용으로도 썩 좋은 전시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와 같이 역사적인 인물들의 모습과 그에 대한 설명을 보니 언젠가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서 배웠던 역사들이, 물론 역사의 큰 흐름은 아니고 대개 그들의 사생활이나 성격에 대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들이 생각이 났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매우 만족스럽고도 흥미로운 전시였다. 초상화는 정말, 다른 미술 장르를 감상할 때와 마음도 떠오르는 생각도 달리지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초상화를 한꺼번에 본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오로지 초상화만을 주제로 기획된 전시회는 처음이는데, 구성도 기획 의도도 모두 좋았다. 그림을 보는 내내, 바람이 불면 움직일 것 같은 섬세한 레이스 표현, 살아있는 눈빛, 어쩐지 지친 것 같은 어떤 이들의 표정, 삶이 그들에게 주었을 시련이 가끔은 지나치게 가혹하지는 않았는지, 장시간 화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며 견뎠을지, 그들 사이의 공기는 어땠을지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평소 그림을 감상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어도 이 전시회는 아주 흥미롭게, 어려움 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역사 속 인물들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아는 것만 해도 재미있고, 다른 장르의 그림에는 잘 쓰여있지 않던 설명들, 그림 속 인물의 생애나 인물과 화가의 관계, 인물이 실제와 얼마나 닮았는지, 화가는 그의 어떤 품성을 담아냈는지 등등 일반 관람객이 궁금해할 만한 정보가 잘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기의 인물들의 눈빛과 분위기, 화가가 포착하려던 인물의 특성과, 그 특성을 살리기 위해 어떤 재료와 기법을 이용했는지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나도 이번 전시에서 재미있는 경험을 몇 차례 했는데, 식물학자라는 설명만 잠깐 보고 흠, 그의 인물에서 식물에 애정을 쏟을만한 어떤 품성의 증거를 찾아보려고 애쓰고, 또 꽤 진지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을까 생각하다가, 이어 그가 다소 파렴치한 인물이었다는 나머지 설명을 읽고는 그래, 그럴 줄 알았다고 단숨에 태도를 전환하여 그의 눈빛이나 턱을 다문 모양새가 어쩐지 비열했다는 결론을 내려버리는 것이었다. 또, 어떤 모델을 보고 어떤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인가 궁금해하다가, 이어 사랑하는 사람이 촬영한 애정의 결실과도 마찬가지인 사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기도 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라는 영화가 현실이 된다면, 하고 바라게 될 만큼, 몇몇 초상화는 실제로 바람이 불면 옷자락이 흔들릴 것만 같이, 곧 뚜벅뚜벅 걸어나올 수 있을 것만 같이 생생했다. 그들의 형형한 눈빛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내게로 향하는 것 같았다. 나는 초상화를 보며 그들이 화가 앞에 서있던 순간에는 몰랐을 그들의 운명―처형당하거나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는 등―을 읽으며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몇 백년이 지나고 한국이라는, 생전에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거나 적어도 관심도 없었을 먼 나라에 사는 사람이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분명 전시회를 보러 다녀왔는데 꼭 왕릉을 다녀온 것만 같은 엄숙한 기분까지 조금 들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즐겁게 감상할 수 있었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전시의 구성 덕분인데, 예를 들면 어떤 아름다운 여성의 초상화를 보며 훗날 사랑에 빠지게 되는 누군가에 대한 궁금해질 찰나에 그 누군가가 바로 옆에 전시되어 있다던가, 찰스 1세 옆에 올리버 크롬웰이 전시되어 있어서 내가 괜히 유감스럽다던가 하는 것들. 에드 시런이나 에이미 와인하우스 등 초상화 속 인물의 노래를 들어볼 수 있도록 헤드폰도 비치해두었다.





 내가 가장 좋았던 작품은 두 가지 꼽자면(한 가지를 꼽기 어려웠다) <A Map of Days> 라는 그레이슨 페리의 작품, 그리고 브론테 세 자매를 그린 이웃의 작품이다. <A Map of Days>는 예전에 한참 유행하던 뇌 구성도의 고급 버젼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나도 뛰어난 예술적인 능력이 있다면 꼭 그려보고 싶을 정도로 섬세하고 정교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브론테 세 자매는, 그들에 대한 내 애정 때문도 있지만, 접어서 한동안 방치해두었던 흔적이 물씬 나는 것이, 그다지 인정받지 못했던 이웃 화가가 그렸던 작품의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성실한 노력의 흔적이 어쩐지 너무 마음에 와닿았다. 결국은 이렇게 보존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전시회에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하고. 또한, 어떤 식으로든 기록은 유용하고 귀하게 쓰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전시회는 4/29부터 8/15까지 볼 수 있으며, 한 회차당 선착순으로 제한되어 있어 예매하고 가는 것이 좋다. 요즘 시국에 함부로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안전에 주의를 기하며 다녀올 만한 훌륭한 전시 중 하나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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