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만들어낸 기적
인어공주는 오늘따라 더욱 서둘러 바다 위로, 더 위로 헤엄치고 있었다. 저녁 만찬이 길어지는 바람에 자칫하면 바다로 넘어가는 해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바닷속에서는 볼 수도 느낄 수 없는 태양의 붉은 빛 따뜻한 기운은 인어공주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늘 인어공주의 머릿속을 맴도는 건, 그가 보지 못한 더 많은 인간들, 인간들이 먹는 음식과 타는 마차, 꼬리가 아닌 다리로 걷고 달릴 때의 느낌 같은 것뿐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인간들의 세상이 좋은 걸까?'
인어공주는 형제자매들 중에서 유난히 겁이 없었다. 열다섯살이 넘어가면 구경할 수 있는 인간세상에 관심이 있는 건 인어공주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인어가 인간을 사랑하게 되어 결국은 물거품으로 변해버렸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이야기일 뿐이잖아?'
인어공주는 인간의 영혼을 얻어내는 것, 초록색의 멋지고 유연한 꼬리 대신 두 다리를 얻는 것, 목소리를 빼앗긴 채 두 번 다시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는 것에는 추호도 관심이 없었다. 인어공주는 그저,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펼칠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같은 시간, 공주는 침실 옆 발코니에 앉아 바다 전체를 물들이는 저녁 노을을 감상하고 있었다. 유난히 새하얗고 연약한 피부를 가진 공주의 피부가 상할까봐 염려한 왕의 명령으로,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에야 바깥 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바다 너머보다 바닷속 세상이 더 궁금한 걸까?'
공주보다 두 살 어린 남동생은 바다 너머 이웃나라에 유학을 가 있었다. 공주는 바로 그 이웃나라 왕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도, 아직 한 번도 배를 타 본 적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공주를 끔찍하게 사랑해서 모든 위험 요소로부터 공주를 보호하고 싶어했던 왕 때문이었다. 하지만, 십년 전 비극적인 배 사고로 사랑했던 왕비를 잃은 왕은 두 번 다시 같은 고통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 대신, 왕은 세상의 모든 진귀한 꽃과 나무들을 가져와 왕궁 내에 정원을 꾸며주었으며, 온갖 희귀한 이야기를 담은 서적들을 수집해 가장 위대한 도서관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공주는 왕궁 밖의 더 넓은 세상, 진짜 세상을 보길 원했다. 공주의 어머니가 살아계시던 때에, 바다수영을 가르쳐주던 그 때를 그리워했다. 물론, 깊은 바닷속에서만 산다는 인어의 전설도 공주의 호기심을 부추겼다.
'다시 한 번만 바다수영을 해볼 수만 있다면!'
공주와 인어공주는, 오늘 새로운 모험을 감행해보기로 했다. 인어공주는 오늘 저녁 노을을 충분히 감상하지 못해서 아쉽던 참이었으며, 마침 같은 방을 쓰는 언니 공주가 친구의 생일파티에 가서 늦게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공주에게도 힘든 날이었다. 공주는 한참 남은 줄로만 알았던 바로 한 달 뒤로 당겨진 데다, 이웃나라 왕자가 곧 공주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마음이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주는 홀로 바닷가를 산책하기로, 인어공주는 궁전을 더 잘 보기 위해 육지 가까이 헤엄치기로 했다. 그날, 어느 때보다도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선 공주와 인어공주의 눈이 마주쳤다. 어떤 눈맞춤은 시간을 멈추고, 생애를 뒤흔드는 힘이 있다. 공주는 인어공주의 밤바다를 닮은 검푸른 눈동자를, 그리고 인어공주가 바닷속을 마음껏 헤엄치고 다니며 보았던 아름다운 바닷속 세상을 보았다. 인어공주는 공주의 태양을 닮은 붉은 눈동자를, 그리고 공주가 책 속에서 읽은 별나고 참신한 이야기들을 보았다.
공주와 인어공주는 그들이 사는 세상만큼이나 서로 달랐지만, 또 그만큼 닮아있었다. 공주는 비록 왕궁 밖을 나서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호기심이 많고 모험심이 강했다. 인어공주는 어떤 규칙도 명령도 따르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격이었지만, 아주 작은 물고기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아는 배려심이 있었다.
공주와 인어공주는 아주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아니, 그들은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인어공주는 왜 구설이야기 속 인어공주가 칼날이 발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까지, 가족을 떠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버리면서까지 왕자의 곁에 머물려고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공주는 왜 언제나 씩씩하던 왕이 아직도 왕비가 죽던 날의 악몽을 꾸곤 울면서 공주의 방을 찾는지, 왜 공주의 왕궁 밖 외출도 바다 수영도 금지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었다.
공주는 육지로 나오지 못하는 인어공주를 위해 매번 새로운 꽃을 손에 들고, 새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왔다. 그림책, 시, 동화, 장편소설 등등. 인어공주는 바닷속 세상을 궁금해하는 공주를 위해 바다수영을 가르쳐주었고, 진주목걸이를 만들어 공주의 목에 걸어주었다.
공주와 인어공주가 서로를 만게 된 이후, 그들의 시간은 이상하게 흘렀다. 저녁이 된 이후에야 만날 수 있었으며, 공주를 지키는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만나는 것도 한계가 있었는데, 이에 더해 공주가 결혼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늘 두세 시간 정도로 짧게 만나야했는데, 공주와 인어공주가 만나는 시간이 다른 모든 시간을 다 빨아들이는 듯했다. 공주와 인어공주는 서로를 알게 된 이후로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세계, 행복, 충만함을 느꼈지만, 그들이 함께할 수 없는 시간에는 그만큼의 커다란 외롭고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당혹스러웠다.
인어공주가 마녀를 찾아기로 했다. 공주와 인어공주는 이미 서로의 반쪽이었다. 떨어져서는 살 수가 없는, 함께 있어야 완전해지는. 게다가 인어공주가 마녀를 찾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겁이 없던 인어공주는 마녀가 얼마나 깊은 동굴 속에, 칠흑같은 어둠에 있든지 전혀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이군, 내 오랜 친구."
마녀는 인어공주가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아 조금 삐져있긴 했지만, 오징어 먹물을 흩뿌리는 그만의 방식으로 반갑게 맞아주었다. 물론, 늘 검은 수정을 통해 세상 속속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 마녀는 인어공주가 왜 마녀를 그동안 만나러 오지 않았는지, 이번에는 왜 찾아왔는지도 미리 알고 있었다.
인어공주는 마녀와 거래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 마녀의 지혜를 구하러 왔다. 어떻게 하면 공주와 함께할 수 있을지 인어공주는 아무리 고민해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어공주는 불멸의 영혼을 얻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어공주 자신과 공주의 자유와 행복이었다.
사랑을 알지 못하는 마녀는 인어공주가 왜 이런 답이 없는 질문을 들고 찾아왔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당황했다. 지금처럼 저녁마다 잠깐 얼굴을 보면 되지 않니, 공주가 이웃나라로 결혼하러 가더라도 네가 찾아가는 데 문제가 없지 않니, 물어보던 마녀는 인어공주의 눈 속을 뚫어져러 쳐다보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인어공주의 눈 속에 반짝이는 무엇, 그것은 인어들에게는 없다고 알려진 영혼이었다. 마녀가 알던 것과는 달리, 영혼은 결혼식과 목사님 앞에서의 맹세 없이도, 진정한 사랑을 받지 않고 주는 것만으로도 인어에게 생길 수 있었다.
영혼을 가진 인어는 육지와 바다를 자유롭게 오가며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육지로 올라가면 꼬리 대신 두 다리가, 바다로 다시 내려오면 두 다리 대신 꼬리가 생기는 것이다. 너무나 기뻐하는 인어공주에게 마녀는 한 가지 선물을 더 주기로 했다. 앞으로는 이 어두컴컴한 동굴을 곧잘 찾아오던 친구를 보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인어공주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을 알려준 것이다.
인어공주는 다시 한번 크게 놀란 채 재빠르게 할머니가 사는 집으로 헤엄쳤다. 늘 말이 없고 책만 좋아하는 할머니는 그렇다고 말을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올해로 97세가 된 할머니는 꿈 속을 헤매는 눈을 가진 작가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모험이라고는 하나도 모를 것 같은 할머니가 '그' 인어공주라니. 잔뜩 흥분한 인어공주를 맞아들인 할머니는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살아돌아올 수가 있었는지, 인간의 영혼을 나누어받지 못하면 모두 물거품이 된다는 건 순전히 거짓말이었는지, 인어들을 겁주려는 수작에 불가했던 건지 마구 질문공세를 퍼붓는 인어공주에게 할머니는 대답했다.
실은, 마녀와 그런 거래를 한 적도, 왕자를 다시 만난 적도 없다고. 할머니는 왕자가 이웃나라 공주와 결혼하고, 왕이 되고, 아이를 낳고 마침내 왕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까지 먼 발치에서 지켜만 봤다고.
"그렇다면 그 이야기는 누가 만든 거예요, 할머니?"
"아직도 모르겠니? 왕자가 죽고 난 뒤, 물거품이 되더라도 아주 잠깐이어도 그의 곁에 머물렀다면 좋았을걸 후회하며 내가 만든 이야기란다."
쓰리란 회한을 딛고 일어선 할머니를 훌륭한 작가로 만든 것은 젊은 날 인간 세상을 바라고 또 바라며 생겨난 상상력 덕분이었다. 사랑스럽다는 듯 인어공주를 쓰다듬는 할머니의 눈 속에도 무언가 반짝이고 있었다. 진정한 사랑이 만들어낸 기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