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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Oct 28. 2021

영화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를 보고

오로지 여성을 위한 영화

 꿀같은 휴일에 장장 2시간 반짜리 영화를 정녕 봐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게다가, 마음이 너무 혼잡스러워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내 마음 어딘가에서 지금 아니면 이 영화를 보기가 힘들 거라고, 네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이 영화가 줄 거라고 말을 거는 듯 했으므로, 내 나름대로 큰 도전을 한 셈이다. 




 이 영화는, 여성 내면에 벌어지는 전투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는 두 남성이 결투를 준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를 높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는 한 여성, 마르그리트는 그 결투에 참가할 수도 없으나 그 결투의 결과에 운명에 달려있으므로 초조하게 이를 지켜본다. 

 영화는 총 3장으로 이루어지며, 동일한 사건 전개―요약하자면, 마르그리트를 남편 친구인 자크가 강간하여 결투를 통해 하늘의 뜻에 따라 심판되도록 회부된 사건―를 마르그리트의 남편인 장 피에르, 마르그리트를 강간한 장의 친구 자크, 그리고 마르그리트, 이렇게 총 3명이 보고 겪은 대로 보여준다.




 한 여성에게 일어난 가해 사건을 두고 두 남성―즉, 두 가해자―은 자신의 허울뿐인 명예, 알량한 자존심, 자기 자신은 모르고 있으나 자신의 행위로 이미 더럽혀진 이름 때문에 싸운다. 그들이 짧고 어리석은 생을 사는 내내 그랬듯이, 자신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또 주장하기 위해. 이때 여성이 걸고 있는 것은, 피치 못하게 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의 목숨이다. 그는 살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 영화를 통해 나의 관점과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그리고 다를 수밖에 없는지 생생히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사람은 얼마나 자기 관점에서만 볼 수밖에 없는가, 함께 경험한 사건을 해석하는 것이 각자가 가진 관점, 시야, 위치에 따라 가리고 보여지는가를 알 수 있어서, 내게는 반성의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말로도 조금 부족하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관점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할까.  




 그러니까, 아는 만큼 보이는다는 말이 정말 맞다. 전개 양식이 <아가씨>와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내게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아가씨>는 1장에서 숙희는 알 수가 없던 계략, 진실같은 것을 2장에서 비로소 드러내보인다면,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는 명명백백히 처음부터 모든 것이 드러나있었으나, 각자가 편리하게―그러나 불가피하게― 취사선택하여 받아들인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작은 아씨들>이 생각나고 다시금 보고싶어졌던 것은, 여성이 지닌 지성과 힘, 그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사투 등을 적절하고 명확한 방식으로 조명했기 때문이다. 마르그리트는 1장에서 순진하고 별 생각없이 단순한 아내, 2장에서는 작정하고 남편의 친구를 갈망하여 유혹하는 여인으로 보인다. 3장에서 비로소 마르그리트가 지닌 복잡한 내면, 그의 지성과 지혜, 그가 지닌 힘, 그리고 그의 삶 도처에 놓인 폭력과 압제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하여 그가 가진 이 모든 자원을 활용하여야만 했음이 드러난다. 3장에서야 비로소 나는 질문하게 되었다. 장 피에르와 자크가 얼마나,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진실에 대해서 말할 때, 나는 무엇에 귀 기울여야 할까? 나는 무조건 여성의 편을 들겠다. 두려워서, 살기 위해서, 외면의 평화를 위해서, 가문의 수치를 피하기 위해서, 그 어떤 이유로든 침묵하는 여성이든, 그와 똑같은 혹은 정반대의 이유로 목소리를 내기로 선택한 여성이든,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했다가 온갖 내적 외적 압박에 못 이겨 다시 주저앉은 여성이든.




 여덟째를 임신하고 있는 백작의 아내이든, 품위 없고 그저 신난 왕의 아내이든, 절친한 친구였다가 마르그리트가 자그로부터 강간당했다고 주장하자 그를 의심하며 돌아선 친구이든, 그 결투를 지켜보는 모든 여성은 한 마음 한 뜻으로 괴로워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마르그리트에게 최선의 결과가 나오기를 기도할 뿐 다른 방법이 없다. 이것은, 이 영화가 3장을 위한 영화이자, 또 내게 3장만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모든 여성들이 마르그리트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말, 진실에 가까운 말은 모두 여성의 입에서, 여성과의 대화를 통해 나온다.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가문의 수치가 될 것이라고 마르그리트를 괴롭히던 장 자크의 어머니는 말한다. 나라고 젊었을 적이 없었던 줄 아냐고. 살기 위해서 강간당한 사실을 침묵한 채 지금까지 온 거라고. 그렇다면 당신은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른 거라고 말하는 마르그리트는, 5년을 기다린 끝에 비로소 생긴 아이를 낳고 이렇게 말한다. 다른 모든 여성들처럼 침묵할 것을 그랬다고. 이 사랑을 등진 채 목숨을 저버릴 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내할 수가 없다고.




 이 영화가 폭력적이고 견디기 어려운 장면들이 있으므로 관람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게는 결국 어리석고 폭력적이므로 '진실'을 볼 수 없는 남성들의 권력 다툼으로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으므로 원체 잔인한 것을 큰 고통 없이 잘 보는 내게는 큰 무리가 없었다는 것까지밖에는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여성에게 이와 같은 고통을 보고 느끼고 나누자고 강요할 수가 없다.




 자크는 죽음 직전까지 강간 사실을 부인한다. 차라리 지옥에 가겠다고. 그렇다면 지옥에 가라는 장 피에르의 외침 후 자크는 죽는다. 이 얼마나 통쾌한 엔딩인가. 그래, 그렇다면 지옥에 가라. 이 영화는 모든 여성, 마르그리트와 같은 세상에서 살고,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고, 이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여성들을 위한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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