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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Nov 06. 2021

감독이 딸에게 바친 영화, <아네트>를 보고

- Can't I love you?
- No, not really

― 영화 <아네트> 中





 굉장히 궁금했던 뮤지컬 영화 <아네트>를 드디어 보고 왔다. 레오 까락스 감독이 딸에게 바친다는 이 영화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상영관도 많지 않아서 시간이 안 맞는 걸 억지로 끼워맞춘 덕분에 영화 앞뒤로 꽤 뛰어야 했다. 궁금했던 이유는 관객들의 호불호가 상당히 갈렸기 때문인데, 포스터를 믿고 보러 간다면 낭패라고 했고, 이런 영화를 딸에게 바친다는 것에 경악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와중에 레오 까락스의 영화 중에는 친절한 축에 속한다고 했다. 곧 왓챠에 들어온다고들 하지만, 나는 집에서 장장 141분짜리에 영화를 볼 자신이 없는데다, 영화관에서 볼 때 매력이 배가 된다는 뮤지컬 영화이므로 굳이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 <아네트>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한창 잘 나가는 코미디언 헨리(아담 드라이브)는 역시 인기 많은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꼬띠아르)와 연애에 이어 결혼, 그리고 딸의 출산 소식을 전해 대중들에게 충격을 안긴다. 그런데 어느날 여섯 여자들이 헨리로부터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하며 그의 폭력성에 대해 경고한다. 이 사건에 헨리의 인기는 그의 대중들을 웃기는 실력과 더불어 곤두박질치고, 절망에 빠진 헨리는 여전히 사랑받는 가수 안과 요트 투어에 갔다가 술 취한 채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우연히 아네트가 어둠 속에서 불빛을 보면 노래한다는 것을 발견한 헨리는 안과 가까웠던 지휘자와 전세계를 돌며 콘서트 투어를 다니기로 한다. 그러나 지휘자와 안이 한때 연인이었고, 아네트를 그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데 겁에 질린 헨리는 지휘자를 살해하고, 이를 지켜본 아네트의 발언으로 결국 헨리는 재판에 회부된다.





 헨리와 안은 서로를, 그리고 그들의 아기 아네트를 사랑했고, 그 사랑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다. 그러나 흠이 많은 존재들이었므로 그 사랑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일 수가 없었다. 헨리의 말에 따르면, 절벽 끝에 서있던 그가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한 순간, 그 심연이 그를 삼켜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수렁 속에 빠져있는 동안에도 아네트, 흠 하나 없는 이 사랑스러운 아기에게 바라는 것은, 그가 부모에게 받은 가장 귀하고 빛나는 재능, 바로 '노래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아네트에게 노래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노래는 아네트가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뛰어난 재능이자, 온 세상이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며, 동시에 그가 아빠로부터 학대를 받은 수단이자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아빠가 아네트에게서 엄마의 흔적을 찾게 되는 트리거이면서, 지휘자가 아빠로부터 살해당하는 단서가 되기도 했다. 아네트가 노래를 그만두는 것은 곧 모든 불빛은 외면하겠다는 뜻이고, 어둠 속에서만 사는 아이가 된다는 의미이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겠다는, 그가 엄마와 아빠의 그늘 속에 살 때 그랬듯, '살아있는' 아이로서 존재하지 않겠다는 말.





 감옥에 들어간 아빠에게 면회를 와서야 '진짜 살아움직이는 아이'의 모습이 된 아네트는 묻는다. '내가 엄마, 아빠를 용서해야 할까?' 불빛만 보면 노래를 하던 아이가 이제 모든 램프는 다 던져버린다고, 두 번 다시 노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자, 헨리는 충격을 받는다. 

 아네트는 헨리에게, 더이상 아빠는 사랑할 사람이 없잖아, 라고 말한다. 이에 헨리는, 널 사랑하면 안 되겠니? 하고 묻는다. 이때 아네트의 답은, 응, 그건 안되겠어.





 실제로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아이의 교사이자 하나뿐인 가족과도 같은 존재를 죽이는 아빠는 흔치 않을 것이다. 뛰어난 오페라 가수로서 아이에게 그 재능을 그대로 물려주는, 자기만의 왕국을 가졌던 엄마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하든 불행하든 모든 가정은 저마다의 사연이 있기에 마련이고, 대체로는 아빠(혹은 엄마)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엄마와 아이가 모두 고통받고, 서로 비탄에 빠진 채 아이를 이용해 자기 자신을 방어하는 행태로 나타나는 것 같다. 이때 '살아 움직이는, 영혼이 있는 아이'로서 존재하지 못한 채 잔뜩 받은 상처와 홀로 남겨진 아이는 어떻게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까? 그는 부모를 용서할 수 있을까? 다시 노래를 해야 할까? 





 아직 아이도 없거니와 내가 생전에 부모가 될지도 모르는 현재에도 내 자녀를 상상하면 한없는 사랑이 샘솟는다. 물론 부모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테지만. 그러니까 나는 아직 아네트의 처지에 가까울텐데, 헨리의 마음을 너무 알 수밖에 없어 눈물이 났다. 그건 아마 그간의 짧다면 짧은 삶을 통해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가장 사랑하는, 나 자신보다도 소중한 사람에게조차도 때로는 가장 주고 싶지 않은 것밖에는 내놓을 수가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일 것이다. 내 안에서 제일 좋은 것만을 꺼내보이고 싶은데 내 손에 있는 것은 심연 속에서 건져올린 고통과 비탄뿐이고, 그걸로 내 사랑은 나를 증오하게 되고…. 헨리는 평소의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폭력적이고 안하무인에,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로 주위 사람들까지 숨막히게 만드는―이지만 그를 내 마음같이 이해하게 되다니.





 나의 아빠가 나를 위해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면, 나는 그의 모든 과오를 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빠는 내게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네가 나보다 잘 알듯이, 나는 이렇게 구제불능의 끔찍한 인간이라 끊임없이 너의 엄마와 너에게 상처를 줬지만, 나는 너를 너무 많이 사랑해. 너는 나처럼, 심연을 절대 들여다보지 말고, 네가 사랑하는 대상에서 눈을 떼지 말고, 제발 '노래하기를' 멈추지 말아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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