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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Nov 10. 2021

영화 <퍼스트 카우>, Still beautiful.

"스틸 뷰티풀(Still beautiful)."


― <슬픈 세상의 기쁜 말들>, 정혜윤 저




 어제는 휴가를 내고 영화 <퍼스트 카우>를 보러 다녀왔다.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에서 곧 다뤄주실 영화이기도 하고, 나도 영화 <어떤 여자들>을 보기 전에 평론가들의 평이 굉장히 좋은 이 영화를 꼭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다. 상영관이 너무 없었고, 시간표도 애매했는데 그중에서도 좋은 시간대로 표를 잘 잡았다.





 강물이 잔잔히 흘러가는 것과 같은 빠르기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역사가 개입하기 이전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실은 영화를 보기 전에, 굳이 두 남성의 버디무비를 내가 봐야 할까 싶었는데, 감독의 전작을 모두 보고싶어졌을 만큼 섬세한 결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를테면 쿠키가 버섯을 채집하던 중 뒤집어진 도마뱀을 발견하고는 바로세워주는 장면이라든가, 젖소에게서 우유를 짜면서 도란도란 칭찬과 감사의 말을 건네는 장면들.





 굉장히 느리게 진행되는 영화이고, 그래서 잠이 온다는 후기며, 평론가들의 높은 점수는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는 후기도 있어서 나도 조금 겁을 먹은 참이었다. 그러나 누구나 즐길 수는 없는 영화일 수는 있어도, 분명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닌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쿠키를 연기한 배우의 눈빛과 눈을 깜박이는 방식이 너무 좋았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는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자연을 닮은 사람을 재현해낸 연기였다. 희한하게 죽이 잘 맞는 이 두 사람은 어떤 범죄 행각을 벌여서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졸여야 했다. 내게는 심리스릴러 같은 영화였다.





 영화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금을 캐러 사람들이 서부로 모여들던 개척 시대에, 사냥꾼들과 함께 다니며 요리를 전담으로 하던 쿠키는 알몸인 상태로 쫓기고 있는 중국인 킹 루에게 옷과 먹을 것을 구해준다. 이들은 이후 마을에서 우연히 재회하는데, 늘상 사업 구상을 하는 킹 루와 베이킹 솜씨가 있는 쿠키는 스콘을 만들기 위해 마을에 하나뿐인 젖소에게서 우유를 훔치기 시작한다. 스콘의 맛에 감탄한 그들은 곧이어 스콘에 꿀을 발라 팔기 시작하고, 인기를 끈 스콘은 젖소의 주인의 마음까지 사로잡는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우유를 훔치다가 발각당한 킹 루와 쿠키는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안전한 장소에 이르게 되면 함께 꿈꾸던 것처럼 그동안 모은 돈으로 자그마한 호텔을 열게 될까?





 처음 킹 루의 거처에 들어설 때부터 빗질을 하고, 꽃을 꺾어오던 쿠키와 계속해서 돈, 사업 얘기를 꺼내는, 우유를 훔치자고, 스콘을 팔자고, 의심받는 상황 속에서도 우유는 계속 훔쳐야 한다고 말하는 킹 루는 너무 다르면서도 묘하게 잘 들어맞는 친구다. 게다가 유머코드까지 잘 맞아서 쿠키가 심심한 농담을 툭 던지면, 킹 루는 너무 좋아하면서 하하하, 웃는다. 나는 돈을 많이 벌기 전, 이들이 블루베리를 채집하고, 부츠를 손보는 그 모든 일상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좋았다. 마음이 촉촉하게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강물이 흐르는 장면을 길게 보여줄 때는 내 마음도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고. 별일 없이 목적도 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생을 살 만하게 만드는 것일테다.





 상영관이 얼마 없는 이 영화를 꼭 보고야 말겠다고 휴가를 낸 덕분에 가을날 석촌호수 구경도 했다. 단풍이 대부분 떨어졌지만 비 오는 날 커다란 창 너머로 굽어온 석촌호수는 여전히 울긋불긋 아름다웠다. 몇 주 전, 날이 한참 좋을 때 와서 산책이라도 한 바퀴 했으면 훨씬 좋았을텐데, 아쉬웠다. 내년 가을에 놓치지 않고 들려야 할 장소가 하나 더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픈 세상의 기쁜 말들>(정혜윤 PD님 저)에서 아직 가을이 채 가지 않은 석촌호수는 발견한 문장처럼, "스틸 뷰티풀(Still beati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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