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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Nov 22. 2021

영화 <디어 에반 핸슨>을 보고

청소년과 학부모께 꼭 추천하고 싶은 뮤지컬 영화

 이 영화는 관객들의 호불호가 꽤나 갈리기에 볼까 말까 엄청 고민을 했는데, 난 뮤지컬 영화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에 음향이 좋은 관으로 골라서 갔다. 매우 인상깊게 봤으며, 지금도 종종 음악을 찾아듣곤 하지만 뮤지컬 영화 <아네트>는 보는 내내 귀가 그렇게 즐겁지 않았던 반면, <디어 에반 핸슨>은 후기를 보고는 내가 감각적으로 즐길 수 있는 영화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노래를 들으러갔던 건데, 예상외로 좋았던 부분들이 많았다.





 결론적으로, <디어 에반 핸슨>은 귀는 무척 즐거웠으나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한 영화였다. 주인공의 거짓말이 산더미처럼 불어나서 나처럼 간이 작은 사람은 괴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 그래도 여전히 잘 만든 뮤지컬 영화라고 생각한다. 되도록 많은 이들에게 되도록이면 영화관에서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영화를 보고 이틀이 지난 후 느낀 지금의 감상은, 이 영화는 온전히 청소년들에게 바치는 영화라는 것이다. 그 외의 연령대는 즐길 수 없는 영화라는 그런 뜻은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는 청소년들이 가장 공감할 수 있을 법하고, 그들에게 위로가 될 법한 영화였다. 영화를 보면서야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지나왔으며, 그렇다고 그 모든 과정이 견딜만 했던 것은 결코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모두 지나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때는 내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던 것들―친구관계, 학교에서의 내 이미지와 평판―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했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불가능한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영화 <디어 에반 핸슨>의 제목은 불안정한 소년 '에반 핸슨'이 스스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따왔다. 이 편지는 상담치료사로부터 받은 과제인데, 이를 보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엇나가던 동급생 코너는 오해하고는 매우 화를 내며 편지를 가져가버린다. 그리고 며칠 후, 코너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발견된다. 코너가 간직하고 있던 편지를 유서로 오해한 유가족은 그들의 우정과 그가 아는 코너에 대하여 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사실대로 말할 작정이었던 에반 핸슨은 어느새 함께 간 과수원 이야기, 서로 주고 받은 이메일을 조작하며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 거짓말 덕분에 쭉 짝사랑하던 코너의 여동생, 조이와 사귀는 사이가 된다. 그의 거짓말은 들키지 않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1. 가장 좋았던 부분 중 하나는 줄리안 무어가 나오는 부분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유일한 가족이고 같이 살고 있는데도 각자의 마음에 크게 웅크리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 채 서로의 진심―자식이 흔히 하는, 본인이 부모에게 큰 짐일 것이라는 오해―을 헛짚을 수밖에 없는, 대화할 시간이 부족하고 자녀는 또래 집단의 유대관계가 너무 중요한, 딱 그 나이대의 부모-자녀 간 흔히 겪는 갈등을 선명하게 잘 그려냈다. 특히, 결국 엄마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자괴감에 빠져있는 아이에게 줄리안 무어가 하는 위로가 너무 적절하다. 모든 자녀들이 원하는 그런 위로랄까. 바로 이런 내용이다―이 모든 건 지나갈 거야. 그리고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2. 또 하나, 내게도 위로가 되었으며 청소년들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알라나의 이야기이다. 학교에서 이런 저런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자신감 넘쳐 보이는 알라나는 본인 역시 상담 치료를 받고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것을 털어놓으면서 '코너 프로젝트'를 이끌기에 이른다. 에반 핸슨처럼 분명하게 불안정한 아이도 있지만, 누가 봐도 잘 지내고 있는 듯한 아이들도 고꾸라질까봐 계속해서 빠르게 걸어야 하고, 내면의 혼돈이 새어나가지 않게 잘 감춰야 한다. 그에 더해서 알라나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우리는 각자 혼자 앓고 있어. 실은 모두가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는 걸 알게 되면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도움이 되겠니, 하고. 뼛속까지 혼자인 것 같은 시기를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이다. 





3.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제기할 의문이 남아있다. 왜 에반 핸슨은 그렇게까지 해야했는가? 그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도 상처입은 유족들의 마음을 거짓말로 들쑤시고, 말로 끊나지 않고 서로 주고받은 이메일까지 조작하고, 그 관계를 이용해서 연애를 하는 등. 심지어는 그 가족으로부터 장학금까지 받을 뻔했다. 청소년들을 위한 영화라고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 아직 이런 저런 상황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고, 그에 따라서 판단과 대처력이 미흡해서, 또 청소년의 뇌는 아직 미성숙하므로,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말도 안 되는 끔찍한 행동을 저지르고 멀리 나아가기까지 하지만, 그 빈도와 정도는 차원이 다르다.



 혹은, 심지어 지나고 나면 별 일이 아닌 언행을 두고 이 세상에 내 자리가 없을 것 같은 자괴감을 느끼는 많은 청소년들을 위해서도 이 영화는 그렇게까지 멀리 가야했다. 친구에게 인사 한번 건네는 것도 어려웠던 에반 핸슨이 사람들 앞에서 스피치를 하고, 그 스피치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또 그가 망쳐버린 모든 일을 밝히기 위해 진실을 말하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러나 그가 벌인 이 모든 일은 용서받을 여지가 있다. 성인과는 아직 또다른 기준을 적용받을 수 있는 시기니까. 괜찮다. 실수가 아니라 잘못을 해도. 그것 때문에 스스로가 너무 미워도. 





4. 청소년들의 자살 관련하여, 이 영화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폭력적이고 불안 조정 장애가 있는, 여동생조차 좋은 점 하나를 발견하기 어려웠던 코너가 갑작스럽게 목숨을 끊을지, 그리고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만큼 고통스러웠을지 아무도 몰랐다. 나무를 오르다가 팔이 부러졌다고 말하는 에반 핸슨이 실은 너무나 혼자라고 느낀 나머지 일부러 나무에서 떨어졌던 것을 엄마도, 친구도,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 선택을 미리 눈치채고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른들이 입을 모아 그때가 가장 좋은 때라고 하지만, 나는 내 생에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때가 중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다시 돌아가도 어려울 것 같다. 나처럼 내향적이고 불안정하고 예민한 아이들이라면 누구든 비슷한 경험을 할 것이다. 남들이랑 다른 건데 내가, 그것도 나'만' 틀린 것 같고, 심지어는 이 세상 누구보다 내 편일 부모님과도 갈등이 있어서 내 마음 알아줄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고, 내가 세상에서 없어져도 마음 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십대 때는 그 10년 후, 20년 후의 본인만큼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견디는 방법도, 본인이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것도 모른다. <디어 에반 핸슨>은 이 점을 잘 짚어준다. 어른들의 시선으로 본 청소년이 아니라, 아이들 개개인이 살아가는 모습과 각자의 벼랑 끝에 선 모습을 그림으로써.




 사랑하기 어려운 코너라는 인물이 스스로 만든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이 영화가 보여준 것, 그리고 에반 핸슨이 진실을 모두 밝히고 속죄하는 발로에서 코너를 알아가던 여정 끝에 이 영상을 발견하고 친구들, 유가족에게 보내준 점이 좋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행동에 책임지는 법을 배웠으므로 스스로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영화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고, 믿기 어렵겠지만 그저 자기 자신인 채로 사는 것도 충분히 괜찮다고 보듬아주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를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려준다. 듣고 있자면 위로가 되어서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바로 오늘 출근길에도 나와 함께 했던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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