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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Dec 08. 2021

영화 <레이디 버드>를 다시 보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향하는 여성들에 대하여

 몇 년만에 다시 본 <레이디 버드>는 기억보다 훨씬 좋았다. 레이디 버드는 내 기억보다 더 사랑스러웠고, 영화는 더 코믹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같은 배우(시얼샤 로넌)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똑같이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이야기의 영화 <브루클린>보다 내가 근래에 본 우리나라 영화 <벌새>와 <고양이를 부탁해>가 생각났다. 모두 여성 주연이며, 주요 인물은 죄다 여성이고, 여성이 성장하는 이야기이다. 성장은 반드시 성장통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사회가, 그리고 때로는 그들 곁에서 응원해야 할 주변 사람들마저 그들이 그들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을, 그저 그들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기꺼이 벌주고자 하기에 그들의 길은 더 어려워진다. 그래도 <벌새>에서는 영지 선생님이 있다. <고양이를 부탁해>에는 다소 거리도 갈등도 있을지 몰라도 그 모든 과정을 동시에 겪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레이디 버드>에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친구인 줄리나 엄마 몰래 지원금 신청서를 작성해주는 소극적인 아빠만 있을뿐, 따라갈 북극성도 든든한 마음의 지지자도 없다. 하지만 레이디 버드는 전후무후한 캐릭터다. <레이디 버드>의 시작 부분에서 엄마의 끊임없는 언어폭력을 견디다 못해 달리는 차에서 확 뛰어내렸을 때, 속이 너무 후련했다. 겁많고 내 몸 하나는 너무 소중한 나는 절대 하지 못하겠지만 늘 하고 싶었던 일이므로. 부모님의 차에서 뛰쳐내리고 싶은 적이 한 번도 없던 청소년이 과연 있을까? 가시화되지는 않았더라도 견딜 수 없는 학대로부터 영영 도망나오고 싶은 아이들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하는 장면이다. 그래,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갈 여자아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의 깡과 행동력, 정도를 모르는 엄마를 비명지르게 만들 만한, 벽을 부술 자질을 지닌 아이여야만 꺾이지 않고 꿈을 쫓을 것이다. 그리던 이상향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새싹이 콘크리트를 뚫고 자라려면 그 정도의 배짱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처음 <레이디 버드>를 볼 때는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일삼고 절친을 쉽게 내팽개치고 선생님을 조롱하고― 보는 내가 다 부끄러웠다. 그러나 영화를 다시 보니, 자기 욕망과 표현에 굉장히 솔직하고 그런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레이디 버드가 보였다. 나라면 부끄러워서, 문제를 만들기 싫어서, 다른 사람들 마음을 신경쓰느라 바빠서 가만히 있었을 텐데. 레이디 버드는 적어도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나 했어야 했는데 우물쭈물했다는 후회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진실함은 분명 재능이다. 어떤 이들은 살면서 단 한 순간도 이만큼 진실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 이름을 '레이디 버드'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고 결국에는 졸업식에 레이디 버드라고 호명되는, 열악한 가정형편과 아빠를 제외한 가족 모두의 탄압에 가까운 반대에도 불구하고 늘 말하고 다니던 대로 뉴욕에 있는 아트 스쿨에 가고야 마는 그런 인물인 것이다. 레이디 버드가 바라던 대로 뉴욕에 가서 행복했는지, 그건 모르겠다. 레이디 버드가 응급실에서 깨어나 뉴욕에서 계속 걷고 또 걸어서 성당에 갈 때의 표정, 나는 그걸 읽고 싶었다. 몇 년이 지나 다시 영화를 보게 되면 그때는 더 잘 이해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 순간 자유로웠을까? 분명 자유롭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해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우리는 꼭 행복을 찾아 멀리 떠나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오로지 꿈을 쫓아왔다. 그래서 레이디버드는 꿈을 이뤘을까, 이루게 될까?

 나는 레이디 버드가 영화가 끝난 시점에 그가 쫓는 별에서 멀리 떨어져있을지언정, 혹은 그 별을 찾지도 못했을지언정 그를 믿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숨쉬듯 거짓말을 해도, 자기 자신에게는 늘 진실했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 자신이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현명하게 자기만의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을. 우리는 결국 자기에게로 향하기 위해 가장 멀리 돌아가야하지 않는가.






 레이디 버드처럼 작은 도시, 문화요충지로부터 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태어난 나는 떠나고 싶어하는 레이디 버드의 마음을 찰떡같이 이해했다. 물론, 제나같은 아이도 있다. 엄마가 되고 싶고, 별로 새크라멘토에 불만도 없어서 떠나고 싶은 마음도 없는 소녀. 그러나 레이디 버드는 그런 사람이 못 된다.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꼭 자기 엄마와 닮아서, 가고 싶은 곳도, 사귀고 싶은 사람도, 되고 싶은 모습도, 심지어 갖고 싶은 이름까지 많은 꿈도 야망도 큰 소녀. 나도 꼭 그런 소녀였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이미 고향을 떠나왔음에도 계속 떠나고 싶은 마음이 솟아 안달이 났다. 소도시에서 머리가 커가면서 얼마나 그곳을 떠나고 싶어했던가. 내가 보다 어렸을 때 사랑했던 그곳은 창살 없는 감옥, 내 발목에 감긴 족쇄처럼 느껴졌다. 나를 숨막히게 했던 것은 바로 그 도시의 어떤 가능성도 없음, 그리고 내 눈에 보이는 어른들의 모습 외에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없음. 뻔히 미래가 보이는 삶을, 나를 나로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어른들 속에서 계속 이어가야 하는 것만큼 갑갑한 게 있을까? 그것은 삶이 아니다. 나는 살아있는 게 아니고, 나로서 실존하는 것도 아니다. 산 채로 죽어있는 것이며,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레이디 버드>와 <브루클린>은 무엇이 달랐기에 레이디 버드는 에일리스만큼 행복해보이지 않을까? 괜찮은 남자를 만나지 못해서? 뉴욕이 브루클린보다 뿌리내리기 적합하지 않은 도시여서? 확실히 정감어린 도시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한 달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뉴욕에 머무른 적이 있다. 나는 돈도 없는 학생 때였고, 당시 홀로 미국 이곳 저곳을 여행하다가 마지막 목적지였던 뉴욕에 다다랐을 때 내 마음과 영혼은 바닥이 드러나있었다. 여러모로 뉴욕을 만끽기에 척박했던 몸과 마음과 상황이었으나 뉴욕은 황홀했다. 뉴욕의 분위기에는 그런 것이 있다. 깊은 잠을 들지 못하게 만드는, 내내 심박수가 올라가도록 하는 공기. <레이디 버드>의 시작에 소개된 문장을 쓴 작가이자, <레이디 버드>의 감독이 사랑했다는 작가 조앤 디디온은 뉴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뉴욕은 아주 돈이 많거나 아주 돈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도시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그만큼 자주 인구에 회자되는 말은 아니지만, 뉴욕은 또한, 적어도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 우리같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젊은 시절만을 위한 도시다." 그에 훨씬 못 미치게 뉴욕에 있었던 나도 절절히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에일리스는 브루클린으로, 그리고 레이디 버드는 뉴욕으로 향했던 이유, 그리고 두 여자가 각각 하나는 정착하고 다른 하나는 정착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그 차이를 보이는 단순하고도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거나 틀려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없다.


 여기서 잠깐 작가 조앤 디디온에 대해서 말하고 넘어가야겠다.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되지는 않았던 이 작가의 저서 <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그의 문장은 섬세하게 세공된 작고 날카로운 칼 같다. 그래서 읽는 나는 더없이 행복했지만, 이렇게 예민한 작가가 행복할까, 행복할 수 있을까, 쓸데없이 걱정을 사서 했다. 작가가 사랑하는 작가는 따라 읽기를 곧잘 했으나, 감독이 사랑하는 작가를 읽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런 식으로도 영화를 읽을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영화 <레이디 버드>에서 레이디 버드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자 가장 깊은 감정으로 엮여있는 인물은 그의 엄마이다. 레이디 버드가 호감을 사고 싶어하는 유일한 사람. 그가 훌훌 모든 것은 던져버리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엄마와 있을 때다. 꾹 참고 있던 레이디 버드를 무장해제시켜 울게 만들거나, 가장 크게 화를 폭발시키고, 가장 안달하게 하는 인물. 레이디 버드는 휴일에 엄마와 좋아하는 것―살고 싶은 주택들 임장―을 하는데, 두 사람 다 현재 사는 삶보다 훨씬 좋은 가상의 삶을 상상하며 즐거워한다. 레이디 버드는 아빠가 아닌 엄마를 쏙 닮은 것으로 보이는데, 보통 아닌 성질이나,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곳, 더 좋은 것을 열망하는 마음 모두. 그건 더 좋은 버젼의 나 혹은 다른 사람도 포함하기 때문에 더 자주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다른 사람의 더 좋은 버젼을 볼 수 있으므고 더 쉽게 포용하기도 한다. 또, 동시에 매우 냉혹해질 수도 있다.


나는 부모 중 한쪽과 꼭 닮은 자녀는 필시 그들과 강한 애증의 관계로 얽히고 마는 걸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가장 영향을 많이 준 부모를 가장 미워하면서도 벗어날 수 없이 사랑하는 것. 나는 아빠와 똑 닮은 딸로서 아빠와 이런 관계에 있기 때문에 든 생각이다. 그러나 이렇게 강한 성격을 물려받지 않은 자녀는 이런 문제에 봉착할 일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 평화로울까, 아니면 유순한 성격에도 그 특유의 개성이 가족 안에 똑같이 발현되었을 때는 필시 갈등을 유발하는가?


 레이디 버드의 엄마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송곳으로 내 가슴을 후벼파는 듯 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아동학대다. 아직 스무살도 안 된 한참이나 어린 딸에게, 너를 키우는데 얼마나 많이 돈이 드는지 아느냐고 묻고, 아빠가 실직한 상태라 돈도 없고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면서 일방적으로 배려를 강요한다. 뿐만 아니다. 수건을 두 개 써도,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구제샵에서 겨우 골라 즐거워하는 중에도 엄마의 가스라이팅은 멈추지 않는다. 이런 상사가 있어도 정신과를 다녀야 할 것 같은데, 레이디 버드는 이걸 십대의 나이에, 가정에서 겪는다. 레이디 버드는 이 작고 가난한 집에 태어나길 자처한 적도 없고, 아빠의 실직이나 우울증에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직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아이는 뉴욕의 아트 스쿨로 가고 싶은 꿈의 날개도 모두 꺾인 채 집에 남은 채 뻔히 보이는 인생의 선로를 따라갈 것을 강요받는다. 성정이 어떻든 많은 희생을 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들은 자신의 딸에게만큼은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다. 자기 자신과 분리되지 않는 또 다른 '나'인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늘 나보다 더 소녀같은 엄마를 둔 나로서는 세상에 이런 엄마가 정말 있을 수 있나 모든 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으나, 동시에 제일 친밀하기에 더 냉혹한 칼날을 들이대는 많은 장면들에서 어떤 기시감같은 것을 느껴야 했다. 나도 레이디 버드와 같은 세월을 견뎌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자녀 관계에서 그렇듯이, 레이디 버드는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자질이 있기 때문에 엄마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그 어려움을 헤치고 더 나아갈 수 있다. 나는 레이디 버드가 엄마와 한참 다른 인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레이디 버드에게는 강한 성정과 더 높은 곳, 더 좋은 것을 볼 수 있는 그 눈과 그것을 바라는 욕망, 그러나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레이디 버드를 규정하는 귀한 자질, 바로 진실함이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기껏 딸에게 쓴 여러 장의 편지를 모두 버렸지만, 레이디 버드는 전화를 건다. 엄마가 마음과 달리 입을 굳게 닫아버릴 때, 레이디 버드는 묵묵부답하는 벽같은 엄마에게 절규한다. 다시 소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편을 찾는다. 그의 인생 여정에서 늘 그랬듯이. 



 처음 영화를 봤을 때 나는 레이디 버드에 굉장히 이입해서 봤기 때문에, 실은 나를 대입해서 봤기 때문에 레이디 버드가 뉴욕에서 행복하며, 잘 살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고향을 떠나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고향을 떠나왔기 때문에 갈수록 더 잘 지낼 수 있게 된 나처럼. 그런데 두 번 보니, 어쩌면 레이디 버드는 뉴욕에서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뉴욕의 길거리를 걷고 또 걸을 때의 레이디 버드의 표정은 읽어낼 수는 없었으나―확실히 그는 새크라멘토에서보다 자유로워보였다. 그러나 행복해보이지는 않았다. 마음 어딘가가 그때와는 다르게 비어보였다. 보물찾기를 하러 강을 건너고 산을 건너 상자를 열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을 발견한 것과 같이―, 바로 뉴욕에 만난 '아무 남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하고―늘 '레이디 버드'라고 고집부렸으면서!―, 자신의 고향을 한번에 못 알아듣자 되는대로 샌프란시스코로 말하는 장면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고향을 아무렇게나 말하는 건, 대화 상대가 전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이건 어떻게 보건 아무렇지도 않은 장소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이 장면에서 상대방을 제대로 '응시'하고 있지 않다. 마음이 저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 너머가 어디일까,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새크라멘토? … 뉴욕에서 그는 간절하던 새크라멘토에서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레이디 버드는 다시 새크라멘토로 돌아가게 될까? 그건 모르겠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 그는 자신에게 진실할 수 있는 장소를 찾을 것이다. 얼마나 오래 걸리든, 얼마나 오래 돌아가든. 





 이 영화는 중요하고 커다란 하나의 질문으로 내게 던져졌다. 왜 많은 영화 속 여성들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고자 하는가? 이 질문은 내 안에서 계속 맴돌았고, 오랜 고민 끝에 내가 찾은 답은 이렇다.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을 떠나려는 욕망은 '지금 이곳에서의 나'를 떠나고 싶은 욕망과 다르지 않다. 보다 정확히는 내가 나로서 존재하기 위하여, 즉 여기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자유를 움켜쥐기 위하여 이곳에 머무를 수 없고 도망치듯 떠날 수 밖에 없는 선택지뿐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만약 내가 사는 이 장소에서 탐색할 수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다면, 내게 그만큼의 자유만이라도 있다면 나는 떠나지 않아도 좋을텐데. 여성에게 허락된 선택지가 많지 않으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우리의 눈은 발로 땅을 딛고 선 여기가 아닌 곳, 보다 멀고 높은 곳에 고정되어 있다. 그래서 꿈 속을 헤매느라 다치기도, 위험에 빠지기도, 그러나 별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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