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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Nov 22. 2021

스노우볼 안에 사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소설

소설 <스노우볼 아가씨>, 류희묵 지음

네 것도, 네가 해왔던 것들도 다 사랑이었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충분하다고. 혹시 나중에 망하더라도, 망해서 같이 유리 조각을 주섬주섬 줍다가 만나게 되는 날이 있더라도, 우리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듯이 깨진 유리 조각들을 컵에다 담아놓고 같이 하염없이 바라보자.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아름답다고, 그리고 충분히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고 말하는 날이 언젠가 오겠지.

― 소설 <스노우볼 아가씨>, 류희묵 지음




 주인공 '묵'은 경미한 자폐증(오티즘 스펙트럼)을 앓고 있다. 경미해서 진단도 발견도 늦었지만, 남들이 보기에 어쩐지 뭔가가 다르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그렇다. 예민한 감각을 타고난 그는 어떤 면에서는 또 이상할 정도로 둔감한데, 자기만의 안전한 세계, 스노우볼 속에서 살고 있다. 그의 인간관계는 단촐하다. 한 명의 친구, 유진과 애인, 소가 있다. 유진과는 쌓이고 쌓이던 화가 터져서 연락이 끊기고, 소와는 결혼하지만 현실의 장벽이 너무 무겁고 커서 점차 사이가 멀어진다. 묵의 스노우볼은 깨져버렸다. 깨진 조각을 보고 하염없이 슬퍼하는 묵이 스노우볼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리고 스노우볼 밖의 세상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진단받은 적은 없지만, 스스로 자폐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으로서 임상심리사가 지은 이 소설이 첫눈에 끌렸다. 본인조차 모르고 있을 수 있지만, 나같은 사람이 세상 곳곳에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소설이 더 귀하다. 직업 덕분인지 아니면 자전적인 요소가 얼마나 섞여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고장난 것처럼 느껴졌던 내가 공감할 만한 지점들이 많았고 무엇보다 삶의 경험에서 건져올린 것이 분명한 '빛나는 구절'들―'사랑은 모든 디테일을 신화로 만든다.' 등―이 마음을 촉촉하게 적셨다. 독립출판물로 먼저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종이책으로는 정식 출판되지 않아서 지금은 전자책으로밖에 볼 수 없다. 다행히도 밀리의 서재에서 서비스 제공 중이므로 많은 독자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도 어려서부터 뭔가 다르다고 느껴왔다. 또래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게 늘 어려웠고, 세상이 내게는 너무 시끄럽고 빨라서 상황 판단이 어려웠으며, 어두운 방에서 혼자 책 읽는 걸 제일 좋아했다. 지금 와서야 생각이 난 건데, 어쩌면 시각에도 예민해서 환한 불빛이 내게는 피하고 싶은 자극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았다. 어른들이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적절할지 알 수 없어서 아예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인사를 하면 저런 애가 나한테 인사를 하다니, 하고 혹은 사람들에게 내가 인사하는 것을 목격당하면 불쾌해할까봐 인사를 하지 않거나 못 본 척 피해다녔다. 그런 내게 학상시절이 즐거웠을 리가.





 묵이처럼 단 하나의 진정하고 영원한 친구를 바랐고, 당연하지만 그 기대는 무참히 깨진지 오래된 지금 나만의 안전한 스노우볼을 구축해 살고 있는데, 그마저도 사회성 기술 훈련을 한 묵이처럼 보고 배운 대로 따라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스노우볼 밖으로 던져지면 내가 무너지지 않을지 걱정이 된다. 어쨌든 내게 적당한 보호막은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적당한 보호막 없이는 살아가는 게 불가능한 사람들이.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현실에서나 책에서 보게 되면 언제든 반갑다. 말이 안 통하는 외국에서 인종 차별을 받다가 검은 머리 아시아인을 만난 기분이랄까.





 나는 묵이의 유일한 친구 유진이에게도 몹시 마음이 쓰였다. 유진이는 다음과 같이 사랑을 듬뿍 먹고 자랐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삶에 미련이 없는, 어딘가 결여된 듯도 같고 해탈한 것도 같은 아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해서는 뻔히 안 될 남자들에게만 빠져서 정신 못 차리고, 끝끝내는 본인을 해치는 일시적인 관계에 몰아넣는 아이. 묵이를 답답해하다가 이내 그 답답한 스노우볼 속에서 이만 뛰쳐 나와 현실을 직시하라는 쓴 소리를 하는 아이.




 엄마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교복 다리고 김밥 싸더라. 남동생 소풍날이었거든. 내가 옆에 앉아서 엄마가 김밥을 썰 때마다 홀랑홀랑 다 먹어버렸지. 그리고 “엄마 나 밉지? 나 정말 밉지? 김밥 빨리 싸야 하는데 내가 다 먹어버리니까 밉지?”라고 물었는데 엄마가 가만히 있더니 그러더라. “너 미웠을 때는 옛날에 한동안 집에서 말 안 했을 때, 그때밖에 없었다.”고…. 그때 말고는 날 미워한 적이 없었대….

― 소설 <스노우볼 아가씨>, 류희묵 지음




 어쩌면 나는 유진이랑 더 비슷한 데가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모든 여성들이 유진이와 묵이의 모습을 조금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내게 이 책이 특별히 귀한 것은, 사회가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걸 막 알게 된 어린아이의 마음과, 또래와 잘 어울리지 못하면서도 특정 친구에게 집착하게 되는 청소년 시절의 마음, 그리고 막 사회에 나가고 결혼을 하면서 가지고 있던 환상들이 산산조각 나는 일련의 성장과정이 딱 그 나이대의 솜털 보송보송한 마음처럼 생생하게 그려냈지만, 그 시선과 이야기가 나아가는 방식은 어쩐지 훨씬 성숙하고 나이가 많은 사람이 다 알고 품어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이를 가진 엄마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의 온도와 포근함이랄까.




 '사람들에게 다 있는 볼트 하나가 내게는 없고 나는 그 볼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들에게, 스노우볼 속에 있는 자신이 답답하면서도 나갈 수 없어 괴롭거나, 이미 깨져버린 스노우볼 조각들을 움켜쥐고 그 모든 것이 그러면 아무 의미가 없을 수 있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어떤 식으로든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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