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오늘 내게 절망감을 안겨줄 음악을, 그것도 바흐를 매일 반복되는 하루의 의식에 포함시키는 삶, 상상만 해도 호화롭고 아름답지 않은가.
― <음악의 언어>, 송은혜 저
2022년의 두번째 달, 나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스트레스가 특히 극심할 때, 계속 같은 생각으로 돌아가서 맴돌고 있음을 느낄 때, 나를 사랑하기 어려울 때, 오늘은 특히나 못 달릴 것 같다는 확신이 생길 때…. 그때가 운동화 끈을 묶고 길을 나설 때이다. 집에서 15분 거리의 공원까지 터덜터덜 걸어가며, 달리며 듣고 싶은 노래를 성심성의껏 고르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공원 시작점에서 가볍게 첫 발을 내딛으면, 그때는 안다. 내가 다음 30분간 계속해서 달릴 수 있으리라는 걸. 이건 그간의 경험치가 쌓였기 때문인데, 이제 나이가 든다고 철이 드는 건 아니라는 걸 안 나이지만, 분명 어떤 경험치는 쌓이는 거다. 그러니까 달리기를 어느 상황에서든 내가 어떻게 믿든 상관없이 나는 할 수 있다는 것과, 달리기는 내게 위로가 될 것임을 알게 되었으므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
설부터 글을 써야지 다짐하면서 한 자도 쓸 수 없었다. 읽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내 온 신경이 흩어져서 한 곳으로 흘러가니까. 쓸데없는 고민이 많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과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하여. 너무 조급했고, 미숙했고, 내 세계는 좁았으므로. 내 외면은 내면의 반영임을, 생각은 생각보다 도움이 안 되며,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행동은 감사뿐임을 이제는 아는데 늘 미끄러지곤 한다. 이제 나는 다시 출발선에 서려고 한다. 왜 나를 그렇게까지 쳐다보는지, 혹시 오늘은, 아님 내일은 내게 또 말을 걸지 않을지 기대하는 거 이제 그만두려고 해. 나를 보면 화들짝 놀라서는 멈춰서 한참을 보고만 있는 거, 나를 볼 때 네 눈동자에 반짝, 불이 들어오는 거, 어디서든 너의 눈빛을 느낄 수 있는 거― 다 내 의미부여라고 하더라고. 나도 부끄러워서 더는 못하겠어. 할 만큼은 다 한 것 같아.
그러고보니 요 며칠 슬픈 일들이 많았다. 나는 물론이고 남도 사랑하기 어려웠고, 정말 오랜만에 내 한계까지 본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도망가고 싶었으면서, 동시에 그간 쌓인 경험치와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견디는 건 이전보다 수월했다. 나는 회복력이 좋으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드라마나 영화는 꾸준히 봤다. 먼저 설에 봤던 애니메이션 <씽>과 한국 영화 <킬러들의 수다>, <김씨표류기>, 그리고 요즘 핫한 <술꾼도시여자들>. 먼저 <씽>은 <씽2게더>가 그렇게 재밌다기에 1편부터 보려고 봤는데, 그냥저냥 신나고 동물들은 귀여워서 한번쯤 보기 좋았다. 나는 집에서 봤으므로 홈트를 하며 봤는데, 이런 영화는 집에서 마구 움직이며 보는 것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도 빨리 가고, 몸을 움직이고 싶어지거든. 지금은 <씽2게더>를 삼십분가량 남겨두고 있다. 아, 참 좋은 영화다. 네이버멤버십 구독자인 나는 시리즈온에 막 들어와서 기쁘게 이용권을 썼는데, 아주 만족스럽게 보고 있다. 아마 오늘 운동하며 마지막까지 보지 않을까 싶다.
그 다음은 늘 언젠가는 봐야지 생각만 했던 <킬러들의 수다>와 <김씨표류기>. <아는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 나는 <킬러들의 수다>도 쏙 마음에 들었다. 젊다 못해 어렸던 원빈의 그 유명한 독백 장면이 특히 보고 싶었고, 내 선택은 탁월했다. 머릿속이 복잡하니 아무 생각없이 하하, 웃어버릴 수 있는 영화가 필요했다. 자막 읽을 필요도, 저 넓은 대양을 너머인 만큼의 괴리감, 격차감 없이 수월하게 내 피부에 와닿는 그런 영화. 이런 한국 영화가 또 없을까, 고민하다가 늘 평이 좋았던 <김씨표류기>를 보기 시작했다. 호평에도 불구하고 배우 정재영이 수영장에서 허우적거리는 장면만 보다가 이건 도무지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멈췄었는데, 이 영화는 남자, 여자 두 김 씨가 주인공이다. 한 명은 정재영, 다른 하나는 려원. 배우 려원의 나래이션이 너무 좋았고, 카메라가 이 두 사람의 눈물과 웃음 없이 볼 수 없는 기기묘묘한 생활을, 그러면서 서로 가까워지고 위로받는 관계를 그릴 때 마음이 한없이 노곤노곤해졌다. 이제 안심이 되는 기분. 저 여린 사람들도 거친 세상 속 붙잡을 무언가가 생겼구나, 하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이다.
<술꾼도시여자들>은 설 내내 나를 울고 웃게 한 드라마다. 너무 짧아서 아쉽지만, 시즌 2가 곧 나오니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드라마. 여자 셋이 그 우정을 주제로 주연인 것도, 딱 내 또래의, 너무나 있을법한 일들은 다루는 것도.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로맨스 요소도 나는 참 좋았다. 말도 안 되게 형편없는 남자들이 많이 나와서 현실을 제대로 반영했다고 생각했는데, 특히 배우 최시원이 나올 때마다 그 추잡스러움과 그 큰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연기가 너무나도 적절했다. 엄마아빠에게도 보여드렸는데 아주 즐거워하셨으므로, 아직 안 본 눈이라면 강력 추천.
요즘은 임시완과 고아성 주연의 드라마 <트레이서>를 보고 있다. 꽤 전에 1회를 보다가 말고는 한참은 그냥 두다가 다시 보기 시작했는데―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사람들의 극찬, 총 8회라는 짧은 회, Wavve 이용권을 썩히기 싫었던 것, 그리고 왓챠피디아의 예상평이 상당히 높았던 것― 그동안 내버려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재미있는, 잘 만든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2/18이면 새 시즌이 오픈되므로 기쁜 마음으로 다 보아가는 중. 왜 남의 직장 얘기는 재밌을까? 왜 지긋지긋하던 회사 생활이 TV로 보면 멋잇어보일까? 국세청이 진짜 저런 식으로 돌아가는지, 얼만큼 현실과 닮아있을지도 궁금하지만, 무엇보다 이 드라마는 위로가 된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을만큼 시원시원한 전개도 물론 마음에 쏙 들지만, 대사가 참 좋다. 특히 "살아있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말이 너무 위로가 됐다. 요즘 내게도 계속 들려주고 있는 말이다. 살아있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남아. 이렇게 계속 살자고.
올해는 재물운이 꽤 있으려나 보다. 생각지 못하게 들어온 돈이 꽤 있어서 살까 말까 고민만 하던 오닉스 리프를 샀다. 이북리더기 중 최신 기종인데, 페이지 넘기는 버튼은 없지만 그런 버튼이 있는 케이스를 사서 낄 수 있다. 리디북스에서 나온 리디페이퍼3이 있긴 한데, 이건 오로지 리디북스 책만 읽을 수 있고, 요즘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구독형 전자도서관이나 이용권을 선물받아 한참 잘 쓰고 있는 밀리의 서재를 볼 수가 없어서 답답하던 찰나였다. 고민을 배송을 늦출 뿐!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보고 있는 요즘 아주, 아주 만족스럽다. 이북리더기 치고는 굉장히 빠릿빠릿하고, 초기비용은 좀 들지만 책을 안 사고 볼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걸 생각하면, 꽤 경제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스마트폰을 보고 또 보면서 쓸데없는 잡생각, 세상 부정적인 뉴스들에 휩쓸리고마는 나의 나쁜 습관을 좀 고치려고.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결국 관계라는 걸 최근에 내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새삼 깨달았다. 나의 모나고 부족한 점도. 그러고보니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내 옆을 지켜주는 사람들, 날 배려해주고 내게 호의를 보여준 사람들의 마음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이제야, 비로소. 앞으로 내게 오는 이 귀한 마음들은 쉽게 흘려보내지 않을 작정이다. 온 마음을 다해서 감사하게 붙잡아야지. 내게 와줘서 고맙다고. 이건 흔한 일도 우연도 아니라는 걸 나는 삶으로부터 배웠다고. 사람을 계속 살게 하는 것도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낙담시키는 것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인 것 같다. 그래도 하는 수 있나. 다시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품고 사람들 속에 뒤섞여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