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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은 Jan 16. 2022

수행하는 2022년이 되길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산문

 모든 것을 알아도 문장을 말하는 이유는 그 말의 발설 자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알아도 생을 사는 이유는 살아야지만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아야지만 당신을 보기 때문이다. 당신의 말을 당신의 입으로부터 듣고 싶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삶을 바꾸기 때문이다. 수행이 일어나기 전과 후의 두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목정원 산문




 오늘은 SNPE 바른자세 척추운동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실은 작년 말에 신청을 했었는데, 오마크론의 확산세가 무서울 정도였기 때문에 취소했다가 신년이 들어서야 새 마음으로 다시 신청한 거였다. 갈 때까지만 해도, 그리고 길을 찾지 못해서 15분 정도나(!) 지각을 해서 마침내 찾아갔을 때도 공연히 시간과 돈을 버리는 게 아닐까 고민했지만, 오늘 운동을 마치고 나니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더 많이 알아보았더라면, 하고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거를 곱씹어봤자 무용한 일. 올해 나는 이 운동을 본격적으로 해보려고 한다. 올해 내가 특히 집중하는 키워드들은 다음과 같다. 명상, 자세, 호흡.





 무슨 운동을 하든 다친 적 있는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질문을 받을 만큼 굳은 어깨와 목을 가졌는데, 가장 큰 문제는 평소 자세인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개선 방법을 모를 뿐. 뭔가 총체적으로 잘못된 것 같다는 어정쩡한 확신만 있을 뿐. 요가도 필라테스도 내게 아주 큰 도움은 못 됐다. 열심히 알아보다가 찾은 게 이 SNPE라는 운동인데, 고작 1회를 마친 내가 느낀 바는 이렇다. 사람은 몸을 통해 사고한다는 것이다. 지난 며칠간, 아니 어쩌면 몇 주간 나를 사로잡은 문제에 갇힌 듯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목이랑 어깨를 시원하게 열어젖히고 나니 머릿속이 확 맑아지는 것 같은, 내내 맴돌고만 있던 지점에서 느닷없이 떠밀려나온 것만 같은 해방감이 느껴졌다. 그래, 역시 운동을 가까이해야 해, 사람은 정신으로만 이루어져있지 않다는 깨달음을 새삼 되새긴다. 올해는 특히 이걸 잊지 말아야지. 계속 움직이고, 호흡하고, 내 몸을 감각해야 한다고. 





 마침 시의적절하게 몸을 감각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을 건넨 책이 있다. 운동을 하러 오가는 길에, 내게는 올해의 첫 책과 같은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완독했다. 이 얼마나 뿌듯한 휴일인지. 건져올리고 싶은 문장이 너무도 많았다. 마음에 새겨놓고 계속해서 들춰보고 싶은 문장들이.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은 공연예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가 그간 보고 겪고 살아낸 공연들, 사건들과 삶에 대한 비평을 묶은 책이다. 공연과는 거리가 있는 나이기에 수십 번 고민했지만, 후루룩 넘겨본 페이지 속에서도 느껴지는 깊은 사유, 적확하고도 유려한 표현, 타인의 슬픔을 함께 아파하는 감수성 같은 것이 내 마음을 건드렸다. 이건 반드시 읽어야만 하겠다고 생각했고, 2022년을 이 책으로 열게 되어 너무나 영광이다. 내 선택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하기야 아빠가 언제부턴가 네가 혼자 책을 읽고 있더라, 하던 어린 시절부터 세월이 켜켜이 쌓일 수록 내 독서 내공도 높아질 수밖에. 삶에는 늘 초보지만, 책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그렇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내가 삶에서 마음 푹 놓고 의지할 만한 무언가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이 먹는 것이 나쁘지 않다. 





  토요일에는 지인들과 나눴던 값진 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게 글쓰기가 그랬던 것처럼, 내 존재를 감각할 수 있는 것이 각자에게는 무엇인지. 내게는 달리기였고, 누군가에게는 일기 또는 수영이었다가 코로나19로 인한 현 시국에는 태권도였다. 내게도 일기는 숨 쉬는 일과 같다. 피아노도 그렇다. 그러나 수영이라니. 기관지가 약하고 수영장에 가면 손발의 피부가 벗겨지는 내게서 코로나19로 인해 한 발 더 멀어진 그 수영은 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더 환상 속의 그대가 되었다. 언젠가 꼭 배우고 말 거야, 관절에도 무리가 안 가고 나이가 들어서도 더욱 숙련된 솜씨를 뽐낼 수 있으며, 명상과도 같은 그 운동. 그 언제가 올해가 된다면 더욱 좋겠다.

 




 내일부터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된다. 이번주는 다음주와 그 다음주에도 일하고 있을 나를 위해 또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러는 틈틈히 곧 다가올 주말과 설에 뭘 하며 놀지를 계획하면 된다. 이번 주말은 알차게 놀았다. 이제는 집에서도 섭섭치 않게, 오히려 더 풍성하게 놀 수 있다. 영화관과도 물리적 거리두기를 하게 되었으므로, 집에서도 나름 영화를 즐길 마음자세를 갖추게 되었고, 그래서 토요일에는 <마이 뉴욕 다이어리>를, 오늘은 <티탄>의 반 이상을 보았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프란시스 하>의 더 유쾌한 버젼 같았다. 어린 아이도 먹기 좋도록 달달한 아이싱을 발라놓은 군것질 거리 같다고 할까. 그리운 뉴욕 거리, 눈이 즐거운 의상, 적당히 좋은 OST 등등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적당히 괜찮은 영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이 영화를 고른 건 나도 쓰고 싶기 때문이었다. 매일 글을 써야 한다는 샐린저의 일침이 듣기 좋았다. 지금의 내게 필요했던 영화.





  다만, 요새 아쉬운 것은 글쓰기가 뜸해지고 있다는 것. 가끔 너무나 무용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또 나만 볼 수 있는 일기장에 써야만 하는 내용들이 많아졌기 때문인데―왜 나는 2022년에도 이러고 있는가― 다시 글을 남겨야지. 앞서 발췌한 문단이 정확하게 지적했듯, 수행함으로써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써야지만 나는 내 우물 속 물을 길어올릴 수 있다. 그때의 나는 이전의 나와 다른 나이다. 그러고보니 홍상수 감독의 <클레어의 카메라> 속 대사가 조금 이해가 되는 것도 같다. 사진을 찍은 후의 당신은 그 전과 같을 수 없다는…. 아니, 실은 여전히 모르겠다. 





 이번주 일하는 나를 지탱해 줄 책으로는 참 오랜만에 소설이다. 바로 <섬에 있는 서점>. 적당히 가볍고 뻔하고 다정하고 따뜻한 소설인데, 말 그대로 섬에 있는 서점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적당한 로맨스와 추리, 범죄가 적절히 가미되어 있으면서 책에 대한 사랑이 골자여서,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이야기. 내가 이런 책―쉽게 읽히는 책―을 좋아했던가, 싶으면서 이런 책이 또 읽고 싶어 열심히 찾아보고 있다. 그런데 그보다도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이 내게 공연 예술에 대해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었듯, 전혀 새로운 세계를 열어줄 책을 읽고 싶다. 모든 책은 때가 되면 다 날 찾아올 텐데 왜 나는 벌써부터 조급한지. 좋은 책을 읽을 때면 특히 이렇게 된다. 요즘은 서점과도 물리적 거리두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에 읽을 책을 발굴하는 게 전보다 요원해졌다. 그래도 읽고 싶은 책은 언제나 너무나 많아서 문제이고, 때마다 내게 가장 적절한 책은 늘 만나게 되니까, 그래도 책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항상 마음에 여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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