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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생명 Jun 30. 2024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그 날의 느낌을 가장 잘 살린 것 같아서 -핀터레스트에서

 93년 고3실습생이었던 나에게 그 해 겨울은 쓸쓸하고 적막하며 춥다 못해 시린 겨울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대부분 인문계로 진학을 했고 집안 형편상 실업계로 진학한 나는 학교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설상가상으로  잦은 두통으로 입학 때 반에서 4등 하던 성적은 바닥을 쳤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한 명 두 명 취업을 나가기 시작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성적이 좋지 않으니 좋은 자리에 취직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집 근처에 자리가 나왔고 재고말고 할 것 없이 면접을 보고 다음 날부터 출근을 했다.


  같은 학교 옆반 친구가 같은 날부터 근무를 하게 되어서 서로 의지 하며 지내게 되었다.

 

 문제는 출. 퇴근이었다. 거리는 버스로 30분가량 정도되는 곳이어서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타려면 한 시간가량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들오들 떨며 한 시간여를 기다리다 보면 뺨도 얼고 손도 얼고 입도 얼어붙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다 버스가 도착하면 파김치가 좌석에 이끌리듯 앉는다.

 

 그때였다.


 무거웠던 머리가 맑아지고 감기던 눈을 커지게 만든 무언가.

팝송이었다. 늘 가요만 들어오던 나에게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온 것은. 제목도 가수도 몰랐지만

수 없이 많은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은 그 팝송으로 일시에 모든 피로가 가셨다.


나는 종점에서 내린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기사아저씨에게 팝송 테이프를 좀 빌려주시면 안 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 아저씨의 대답에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도 이 시간에 버스를 타야가 물으셨고 그렇다고 대답하니 기사아저씨가 녹음해서 주신다고 하였다. 고맙고 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다음날 녹음테이프를 받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 팝송은 빈센트였고 밤하늘의 별을 떠올린 내 영감은 정확했다.


여느 버스들처럼 트롯이 아닌 것도 좋았고 기사아저씨도 늘 선글라스를 착용하셨던 걸로 봐선

멋쟁이 이신 것 같았다.


그 테이프엔 if, word, I need you most 등 주옥같은 명곡들이 가득했고 그 후로 나는 지금까지 올드팝송을 사랑하게 되었다.


테이프를 받고 난 이후로 기사아저씨와는 종종 마주치며 인사를 나누곤  하였는데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어 마지막 인사를 전하지 못하게 되어 아쉬움이 남았다.


 그때 그 시절 따뜻하게 날 안아준 엄마의 품속 같았던 그 버스는 운행이 종료되었지만 시린 겨울을 따뜻하게 녹여준 아름다운 팝송들과 철부지 여학생의 추운 겨울을 포근함으로 물들여준 아저씨의 친절한 마음은 이따금씩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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