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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Aug 01. 2021

목욕 예찬!

내가 한때 사랑했던 것들에게서 묻어온 더러움아, 이제 안녕이다!

정말 오랜만에 브런치를 적는다. 그동안은 좀 아팠다. 언제는 건강했나 싶었지만, 이유가 다양했다. 몸이 아픈 날도 있었고, 마음이 아픈날도 있었는데 사실 그 차이가 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십대의 끝을 어떻게 보내고 싶을까 오래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쉬고 싶었다. 


안식년이라고 하자.


올 한 해 안식년을 보내면서 내가 요즘 가장 빠져있는 것은 목욕이다. 1미터 짜리 작은 욕조를 사서, 거의 이틀에 한번 정도 몸을 담그고 한시간 정도 가만히 있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되도록 핸드폰도 잘 들고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한번 빠트려서 그렇다) 


I messed up tonight
I lost another fight
Lost to myself, but I'll just start again

라벤더 향이 나는 거품 입욕제를 바닥에 대충 다섯 스푼 정도 던져놓고, 샤워기를 틀어놓다가 욕실이 뽀얗게 변하면 새 생수 한병을 들고 들어가 앉는다. 세상이 조용하다. 나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주토피아 OST였던 샤키라의 “Try everything”을 틀고 아아아아아- 하며 흥얼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첫구절부터 “I messed up tonight(오늘 밤도 조졌다!)”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물 안에서 들으면 더 끝내준다. 그렇게 한 삼십분 물에서 가만히 있는다. 어떤날은 물이 너무 뜨거워 숨이 턱턱 막히기도 하고, 어떤날은 나가기 싫을 정도로 아득하다. 


종종 가만히 물에 머리까지 담그고 있을 때도 있다. 욕조가 1M인데, 내 키는 173이므로 머리를 담그러면 다리가 벽에 붙어있어야 하지만 뭐 상관없을 일이다. 혼자 있을 건데, 어떤 자세면 어떻고 어떤 태도면 어떻겠는가. 물 안에 가만히 머리를 넣고 있으면 내 심장 소리가 들린다. 작은 벽을 치듯 웅웅-하고 들리는데, 그 소리를 듣고 있자면 가만히 마음이 편안해진다. 웅웅-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내가 이 물 안에 오늘의 불안과 미움과 공포와 우울을 모두 풀어넣고 있다고. 버블버블. 잘 안녹아 물에 둥둥 뜨는 그것들을 억지로 녹이기에 제일 좋은 방법은 역시 잠수다. 


머리를 풀고 들어가든, 묶고 들어가든.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날은 물 귀신처럼 온 몸에 붙은 이 화가 물에 다 녹을 때까지 가만히 머리를 담그고 있는다. 어차피 거품이 눈에 들어가면 따가울 테니까 눈도 꼭 감고 코도 막고 웅웅- 하는 심장소리만 듣는다. 보이는 것도 없고 들이쉴 숨도 없어서 별 생각이 안든다. 그냥 암흑이다. 그러다 한 십오초를 세고 나면 숨이 막혀서 올라와 숨 한번 쉬고 다시 들어간다. 


그렇게 한 삼분. 시간이 굉장히 짧다. 나는 노래 한 곡 끝나는 시간을 버티지도 못하고 더워 고개를 든다. 그러면 그때야 아는 것이다. 별로 화날 일 아니었네. 물론 마음이 마른 장작같았던 나에게는 아까까진 화날 일 맞았겠지만, 젖은 나는 물에 조금 녹은 화를 가만히 보다가 또 다음곡이 나오는 내내 물에 들어가 있는다. 아 걱정할 일도 아니었네. 또 한 곡. 아 이렇게까지 우울할 일도 아니었는데. 


그러다보면 들어가기 전에 큼지막했던 거품들이 녹아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다. 더우니까 머리에 시원한 물 조금 붓고, 생수를 마신다. 와, 목 말랐는데 기분 끝내주네. 이런생각이나 하면서 마개를 뽑는다. 물이 다빠져나갈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는다. 물이 다빠질때까지 앉아있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수위가 높을때는 물 빠지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 수위기 중간정도 오면 그제야 아주 작게 물 빠지는 느낌이 나는데 그게 썩 기분 좋지는 않다. 그러다 바닥까지 오면 왠지 모를 찝찝함에 몸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걸 참고 가만히 있는다. 


지금 녹은 것들이 빠져나가는 중이니 건들지 마시오. 

영화 공기인형처럼. 바람이 슈웅-

마개 가까이 물이 다 빠져나가도 몇 개의 거품은 꼭 남는다. 처음처럼 깨끗하지도 않고, 맑지도 않으며 더는 따뜻하지도 않은 찌꺼기들이 꼭 남는다.  불안도 미움도 우울도 그렇다. 과거에는 맑았고, 따뜻했고 좋았을 기억도 흘러가고 나면 이렇게 찝찝한 것들이 꼭 남는데 이 것들을 보고 있자면 때로는 과거의 그 물도 이렇게 더러웠던 것 같다 착각할때가 있고 그 착각에 빠져 버리지 못하고 남겨두면 이것들이 꼭 다음 물을 채울때 그 물마저 흐리고 만다. 그래서 나는 꼭 욕조를 뒤집어 버리고 나온다. 


그날 풀어낸 것들이 다음 물을 망치지 않도록. 


요즘도 배우들의 연기레슨을 하고, 새 시나리오를 쓰고, 각색 오퍼를 받고 받으면 각색을 하며 지낸다. 안식년이라고 거창하게 말했으나 전에 비해 전투적으로 살지 않는다 뿐이지. 삶을 위한 많은 일들을 해내고 그 과정에서 많은 감정을 묻혀 돌아온다.


어제는 슬픔이 묻어와서 오래 앉아있었고, 그그저께는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화가 묻어와서 또 오래 앉아있었다. 


6개월을 내리 쉬고 나니 이제야 내가 그동안 묻어온 것들이 녹아 전의 내가 조금 보이는 것 같다. 내가 좋아했던 모습의 나. 내가 싫어했던 모습의 나. 사람을 좋아하는 나, 그 사람들을 때로 버거워하는 나. 그 사이의 조절을 위해 내가 만든 방법이다. 안식년과 목욕. 덜어내기와 채우기. 이렇게 다 녹은 말랑한 나를 씻기고 말려서 재운다. 


그럼 아침에는 좋은 생각을 할 준비가 되는 것 같다. 아 오늘은 바질이가 얼마나 컸나. 향이 참 좋던데, 빨리 컸으면. 바질이 동생화분들도 들여오면 참 좋겠다. 이번에는 어떤 시나리오를 좀 써볼까. 지난번에 그 시나리오는 그게 최선이었던 것 같아. 이제 놓고 새로 쓸 아이템을 찾아보자. 이런생각들. 그 생각의 끝에 오랜만에 다시 쓰고 싶은 시나리오를 생각하며 낸 기획안이 통과되었고, 그 시나리오를 위해 2개월을 보낼 준비를 하는 와중에 브런치가 생각났다. 종종 이 곳을 찾는다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며. 여러분께도 이 좋은 방법을 알려주고 싶어서!


다들 목욕하시라. 더운 날의 짜증도, 듣기 싫었던 한 소리도. 오래 녹이고 나오면 마음이 조용해진다. 


내가 사랑했던 조용함. 


오랜만에 그 밤이 와서 기뻐 적는다. 


다들 목욕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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