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혜원 Jan 27. 2022

EP2. 하루키씨 안녕하세요?

자쿠지 스위트,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오후, 자쿠지 욕조에 앉아서 블루투스 키보드로 글을 쓴다. 노느니 염불한다고. 사실 뭘 하고 놀지 몰라서 쓰는 글인데, 아까 풍경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아, 이번 여행은 마음에 오래 남겠구나. 그래서 남겨보고 싶었다 이 여행을. 사실 여행을 즐기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 나는 돈을 번다. 번지는 얼마 안 되었다. 그래도 서울에 내 통장으로 월세를 내는 작은 복층 오피스텔과 작업실을 두고 있고, 종종 이런 휴가비까지 감당할만한 돈을 글로 번다. 물론 조금 모자랄 때는 이런저런 작업들과 연기 레슨이 도와주고. 이번 여행은 광고 기획이 도와주었 다. 고맙다 광고! 릴리즈 될 줄은 모르겠다만.


방금 “여자에게는 야망이 필요하다“ 책을 전부 읽었다. 물 온도가 식어 추워지려는 찰나인데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 날아갈 듯하다.


배운 것을 적어놓고 싶다.


1) “Yes” 라는 대답에는 늘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2) 내가 삶을 사랑하는 것마저 겸손하게 표현할 필요는 없다.
 3) 나는 삶을 협상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모두 이뤄낼 방법을 찾을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장편 시나리오를 4개나 썼다. 내가 무슨 장르에 장점이 있을지를 몰라서 SF, 코미디, 스릴러, 멜로까지 다양하게 2년 동안 4개의 장편을 쓰면서 무수히 마주한 탈락 고배에 삶이 쓰라렸고, 그 쓰라린 순간마다 포기하고 싶지 않아 일을 더 꾸렸다. 영화감독이라는 삶을 안정적으로 살아보고 싶어서 스타트업을 시작했고, 그 덕에 작업실과 지금 사는 집을 누 리지만 때때로 나는 삶에 진저리를 친다. 왜 아직 성공하지 못했지? 왜 아직 내 장편은 계약으로 이어지지 못했지? 그럴 때마다 무너지고 싶지 않아 더 일을 하다가... 아주 무너졌다. 와! 번아웃이다. 번아웃.

(똑.하고 무너져 내렸다)


결국 삶과 타협해보려던 찰나였다.


문창과 시절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책을 떠올리며. 스무살의 정혜원이 본다면 분명 이 정도로도 “와! 너 성공했다!“ 할텐데. 스물아홉의 나는 공허한 마음으로 파도가 다 빠져나간 갯벌의 인천을 바라보고 있다. 뻘안에 조개가 얼마나 많을지. 삶으면 얼마나 맛있을지. 그 조개로 몇명의 사람들이 먹고 사는지, 그래서 바다는 얼마나 축복인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스무 살의 내가 아마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 테다. 네 인생에 가능성이 얼마나 많을지. 그 가 능성을 발굴해내면 얼마나 보람찰지. 그리고 그 가능성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행복해질런지. 그래서 너의 작은 재능은 얼마나 세상을 이롭게 할런지.

그러나, 파헤쳐진 내 마음은?


배우들의 연기 훈련을 돕다보면 내 평생에 없을 가족도 잃고 사랑도 잃고 또 직업도 잃어보고 한 시간 반 내내 받은 돈만큼 울고 웃는다. 그러다 배우가 가면, 작업실 세면대에 앉아서 내 것이 아니었던 눈물을 닦다가 또 운다. 하루키는 분명 직업으로서의 자아를 잘 분리해놓고 살던데 나는 마음이 너덜너덜해 이게 맞나 싶어 밤마다 한 시간씩 꼬박 걸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나는 지금 행복한가? 불행한가? 아, 됐고. 일에 행불행을 따져 뭐하나. 그 시간에 벌지 싶은 순간이었다. 코로나 시대에 이만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데 감사하기도 모자라다싶다가도 이 렇게 살다 죽으면 어쩌지 불안해서 팔에 바라는 것들을 아무거나 안 지워지는 펜으로 적어두 었다.

“계약”

“기꺼이 즐겁게“


그렇게 떠나온 여행인데도 마음이 공허해 어쩔 도리가 없다가 더운 물에서 읽은 책 한마디에 희망을 얻는다. 아, 참 모자란 마음이다.


삶을 참으로 사랑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패대기를 치고 싶을 만큼. 며칠 전, 일본에서 내 영화를 상영한다는 말과 함께 몇가지 QNA를 보내왔는데 그 질문 중에 세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1) 영화를 만들면서 무슨 생각을 주로 하시나요?

2) 영화 속의 인물이 된다면
3) 포근하다고 느끼는 본인만의 공간은?


멋지게 적어보고 싶었으나, 레슨 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아서 솔직하게 적었는데. 첫번째 대답 은 “이 영화를 만드는 내가 행복한가, 함께 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을 (이 영화가) 충분히 행복하게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통해 자유로울 것인가 “였고, 두번째는 영화 속의 인물이 되는 것은 피곤할 것 같아서 되기 싫은데 굳이 따지자면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 같이 기억을 지워도 잊히지 않는 사랑은 해보고 싶다는 대답이었고, 세번째는 복층 2층에 나만의 안전지대를 마련해놓고 산다는 것이었다.


안전지대.


삶에서도 안전지대가 필요할 때가 있다. 너무 속도를 올려 많은 것들을 보려하면 부딪히는 일 이 생기므로. 이번 여행이 바로 그 안전지대를 찾으러 온 여정이라고 나는 생각하기로 했다. 내 인생의 모든 기억을 지워도 다시 글을 쓰지 않을까. 이 일만큼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한 것이 있었나. 그리고 이 일로 이뤄낸 모든 삶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그래서 지금 담아보는 풍경은 샤 커튼을 두고 본 갯벌의 맨 얼굴이다.

쉬폰? 쉬폰이라고 하나 싶다. 반대편이 훤히 비쳐 보이는 샤 커튼과 그 뒤로 영종대교. 그리 고 파도가 다 빠져나간 갯벌. 뻘 안에 사는 것들이 파헤쳐놓은 구멍들.


(아, 날씨가 끝내준다)


삶에 대해서 정의내리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커튼 뒤로 보이는 풍경은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데 실제의 모습이 곰보인 이 갯벌처럼. 아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아름답기만 하다.


잘하고 못하고 얘기해줄 사람 없이 꽂힌 구절이나 엉망으로 흥얼거리는 노래. 마음을 흔드는 책의 문구. 따뜻한 물의 온도, 좋은 소식이 있다고 전해주는 귀여운 우리 배우들. 돌아가면 커 있을 우리 집의 바질 화분. 동네 꽃집에서 샀지만 오랫동안 시들지 않은 파란장미와 카네이 션. 네 편의 시나리오. 그리고 그것들을 사랑하는 나. 아주 느리게 오고 있는 나의 “YES”까지!


나는 삶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겸손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 타협하지 않겠다. 내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으며.


내 인생의 샤 커튼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작가의 이전글 EP1. 냅킨 던지는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