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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 Jun 23. 2022

다시 시작하는 중입니다 #8화

인생의 시계는 내가 굴리는 게 아니다.


응급실에 도착했다.

 완전전치태반인데 출혈이 있어서 온 탓에 간호사들의 손길이 바빴다. 나는 아기와 내가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겉으론 침착했지만 실은 다리에 힘이 풀린 지 오래였다.

간호사들은 코로나 검사를 하고, 급히 내진(출산 시 자궁이 벌어진 정도를 확인하는 것)을 했다. 그런데 내진을 하던 간호사가

"어머! 어떡해! 애기 머리인가 봐요!"  하고 외치더니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커진 눈알만 굴렸다.

'아기 머리요? 아기 머리라고요?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라고 묻고 싶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차하고 바로 오기로 한 남편은 아직도 나타나질 않았다.

태반이 막고 있어서 아기 머리가 보일 수 없을 텐데 그렇다면 진짜 심각한 상황이 된 건데 나는 어쩌나 하고 울고 싶어 졌다.


잠시 후 당직의사가 왔다. 다시 내진을 하더니 말했다.

"환자분 걱정 마셔요. 간호사 선생님이 태반을 애기 머리로 착각하신 거네요. 그분도 산부인과 응급실 10년 차인데도 이런 실수를 하시네요. 워낙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라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 "


아휴. 놀래라.

출혈은 있으나 아직 태반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진통이 주기적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아가야. 너 대체 왜 그리 급하니?" 하고 묻고 싶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상황은 아닌 것 같아 당일 수술을 받기로 했다.


고위험군 산모들을 전문으로 진료하는 담당교수는 오전 외래진료가 있었기에 내가 응급수술을 받아야 할 경우 그분의 수술을 받을 수  없었다. 나는 버텨야 했고 가급적 점심을 넘겨야 했다. 

뭐 이렇게 쉬운 게 하나 없는지 원. 난관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수술방이 빈 곳이 없어서 오후까지 버틴다 해도 언제 수술할지 모른다는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어야 했다.


어차피 맞을 거면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데 새벽부터 오후까지 쫄쫄 굶은 채로 기다리니 배도 고파오고 너무 괴로웠다.

게다가 친정부모님은 인근의 다른 종합병원에 계시고, 남편은 직장 일이 산더미같이 쌓인 상태라 난감한 상황이었다.  두 아이들은 하룻밤만 있을 예정이던 할머니 집에서 급작스레 장기체류자로 신분이 바뀌었다.


심란함과 배고픔이 절정에 달한 오후 3시. 수술방이 나왔다는 소식에 급하게 수술실로 향하게 되었다.


엄마야 무서워.

티비에서 보면 남편들이 울면서 아내 손을 꼭 잡고 "여보 사랑해~"  하고 외치면서 서로 손을 뻗고 뭐 그러던데 현실은 역시 딴판이다. 남편은 의사로부터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뭔가에 동의하느라 정신이 없고 대충 나와 인사하고 헤어졌다. 


치질 수술 외에 수술받아본 건 처음인데 게다가 전신마취라니  너무 겁이 났다. 수술방은 춥디 추워서 냉동고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환자복이 벗겨진 채로 남의 손에 의해 수술대로 옮겨져 덜덜 떠는 내 모습을 보니 무슨 살덩어리, 돼지 한 마리가 누워있는 것 같았다. 인격체가 아닌 듯 그저 수술 대상으로 전락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차가운 공기와 온갖 금속기 구들 때문이었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내 앞에 오갔다.


'나는 여기에서 어떻게 될까? 살 수 있을까?

자궁이랑 태반이랑 잘 분리가 되긴 할까? 유착이 심해서 인터넷에서 본 후기들처럼 자궁도 적출해야 하면 어쩌지? 아기는 건강하겠지? '


그때

"환자분. 마취할 거예요. 자~ 입으로 크게 숨을 들이쉬세요. 열까지 세어볼게요~" 하는 말에 맞춰서 숨을 들이쉬었다.

'하나. 두. '

둘을 끝까지 세지도 못하고 나는 잠에 들었다.


잠시 후 깼을 때 나는 병실로 향하는 덜컹거리는 침대에서 신음하고 있었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힘도 실리지 않는 입을 움직여 울면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몸이 타버릴 것 같아. 너무 아파., "


젊은 시절 지옥철을 타고 출퇴근하던 시절 시끄러운 록음악을 들어서 작은 소리를 잘 못듣게됐다는 남편은

혼잣말같은 나의 말을 못 들었다.  


37주 차 0일.

나는 그렇게 셋째 아이를 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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