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1. 비가 오는 날

내가 사는 이 곳은 어제부터 비가 온다.

시계는 아침이 밝았다고 외쳐대지만 하늘은 잿빛,

눈은 떠지는 데 몸이 일어나 지지 않는 아침이다.



회사로 출근하는 길,

평소엔 아무것도 아닌 북적거리는 역을 통과해 전철을 타는 일도,

비가 오는 날이면 유독 번잡해진다.

우산이라는 짐이 하나 더해진 것뿐인데 그게 참 번거롭다.

비로 인해 전철이 연착이라도 될까 신경 쓰는 탓인지,

항상 양보를 하던 사람들도 날이 선 표정으로 개찰구를 통과한다.

역이 복잡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비 오는 날은 확실히 다들 서두르는 분위기가 있다.

이런 날은 사소한 트러블에 엮이기 쉽기 때문에 나도 알게 모르게 발을 빨리 움직인다.


사람으로 꽉 찬 전철에서 내리면,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향한다.

좁은 길이 아닌데도, 우산으로 메워지는 날이면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다.

전철보다도 비의 영향을 많이 받는 버스는, 운이 나쁘면 30분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겨우 버스가 와도 사람으로 꽉 차 못 타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에 최대한 앞 쪽으로 줄을 서야 한다.

이런 교통문제는 아무래도 전 세계 공통인 것 같은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버스에 올라탔을 때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오늘은 운이 좋은 날.

덕분에 약 30분 정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혼자는 아니지만, 혼자의 시간으로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30분.

버스는, 좌석이 앞을 향해 있기 때문인지 전철보다 주변 의식을 덜 할 수 있다.

게다가 창 밖 풍경까지 마음 편하게 구경할 수 있다.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들으며 비 내리는 창 밖을 볼 때면, 여러 생각이 든다.

오늘은 문득,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 있기까지 지나온 날들의 기억들이 스쳐갔다.


'외국인 노동자'란 신분으로 지내온 세월 어언 11년.

이제는 태어난 나라의 문화도, 지내온 나라의 문화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이방인 그 자체가 되어버린 지금.

지금이 있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더라...

비가 오는 날 스쳐 지나가는 추억들은 평소 떠오르는 그것보다 무척 깊고, 선명하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창문에 비치는 내 얼굴. 무표정한 얼굴.

어색한 나의 모습을 훑다 눈에 들어오는 창 밖의 사람들.

작은 학생도 있고 큰 어른도 있다. 나는 어디쯤일까.

어디서 본 듯한 생김새,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은 모습의 사람.

아, 그때 그 친구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창문을 따라 움직인 시선의 끝엔 앳된 모습의 대학생.

머리를 숙이고 꾸벅꾸벅 조는 모습에,

그 시절 그때의 내 모습이 또 한 번 스쳐 지나간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불현듯 정신이 들면, 어느새 내려야 할 정류장.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로 걸어가는 시간은

마구 펼쳐놓았던 머릿속의 지도를 차곡차곡 접어야 할 시간.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가는 그 시간들을 아무렇지 않게 보내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 남아있는 기억들이 흐릿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건 기분 탓일까.

그.. 언제였더라.. 누구였더라.. 어디였더라..








하루하루의 기억들이 사라진다는 게 너무 아쉬워,

한동안 닫아두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이방인으로 살아온 11년의 이야기.

외국인 노동자로서 겪어온 이야기.

대학 이야기. 사람 이야기.


글을 쓰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면

조금 더 윤곽이 잡힌 추억을 가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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